부자의 산티아고 순례길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하며 여행이 시작됐다. 공항은 늘 설레는 곳이다. 애플 사옥처럼 도넛 모양으로 생긴 콘크리트 공항 덕분에 파리에서의 하루가 더 재밌을 거라는 괜한 기대가 생겼다.
가운데 빈 부분을 가로지르는 여러 무빙워크는 놀이터 타이어 놀이처럼 푹푹 꺼지게 만들어졌다. 지하 어딘가에서 쉼 없이 움직이고 있는 캐리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시작하자마자 유독 내게 불운함이 터져 나왔다. 미리 사 온 유심이 터지지 않았고, 공항 철도 티켓을 두 장 구매했는데 내 것만 게이트가 열리지 않았다.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다.) 역시 타지는 이방인에게 호락호락하지 않구나. 느슨해진 마음에 긴장감이 들었다.
이번 여행에 있어 파리는 단순히 지나치는 곳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도착하니 괜히 신이 났다. 그냥 흘려보내기에 파리는 꽤 아름다운 도시다.
엔조이 호스텔에 도착했다. 내일 아침 TGV가 출발하는 몽파르나스 역과 가까우면서도 저렴한 덕분에 선택했다. 부킹닷컴의 후기를 보니 역시 같은 이유로 순례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가장 꼭대기인 5층에 있는 3인실에 배정받았다. 파리의 건물들은 G층(=0층) 에서 시작해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 동양인이라 무시한 거지!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든다.
바로 옆에 있는 까르푸 익스프레스에서 장을 봤다. 동네 편의점 같은 곳에 맛있어 보이는 게 이렇게 많다냐! 그치만 간단한 음식만 챙겼다. 내일 떠날 여행자에게 쟁여두고 먹을 것은 사치라는 걸 느꼈다.
그렇지만 길 건너 브랑제리를 지나칠 수 없었다. 편의점에서도 놀랐는데 빵집에는 맛있는 게 더 많아 보이네.
우리가 들어오니 알바생이 쬠 당황한듯하다. 3.50유로를 ‘쓰리-피프틴(?)’이라 읽으셨는데, 어딘가 모르게 맘이 편해졌다. 영어 못한다고 쫄지 말고 자신 있게 떠들면 되겠군.
빵 사서 나오자마자 문을 닫으시네! 오늘의 마지막 손님이 되었다. 불운함으로 가득 찰뻔한 하루에서 만나는 작은 행운.
호스텔에 돌아와서는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 아빠와 나 둘뿐이라 샤워를 위해 옷을 훌렁 벗었다. 그러자마자 문이 철컥 열리는 게 아니겠는가. 방에 붙은 0.5평짜리 화장실에 후다닥 들어왔다. 아빠와 짧은 대화 소리를 엿들으니 대만 여대생이었다. 첫인상을 빤스 바람으로 맞이했겠군^^;
샤워 끝나고 나와서도 소녀는 등을 돌리고 있었다. 작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나 할까. 나는 적막하게 옷을 꺼내 입었다.
시차 때문인지 잠에 들기 어려웠다. 삐그덕거리는 침대와 덥고 건조한 공기, 오토바이 소리. 이동 기간은 언제나 힘들다.
아빠는 아침에도 대만 소녀에게 자불자불 말을 걸었다. 우리는 아빠와 아들이고 산티아고에 갈 거야. 두 유 노 생장?
알고 보니 아빠는 타이완 소녀를 안심시키려고 우리가 부자임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동안 패키지여행 위주로 다니셨던 아빠에게는 외국 소녀와의 혼숙이 신선한 충격이었나 보다.
몽파르나스 역에 가는 길. 일요일 아침이 고요하다.
역 앞의 마트에 들러 기차에서 먹을 음식을 샀다. 다행히 한국에서 챙기지 못한 면도기도 샀다. 볼품없는 간신 수염 신세는 면했다.
몽파르나스 역에 도착하니 온 세상 사람이 모인듯하다. 카페에서 아메리카노와 잠봉 뵈르 샌드위치를 하나 때렸다. 그런데 바게트가 질겨서 이가 좋지 않은 아빠는 영 신경 쓰이시나 보다. 조금 더 섬세하게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차 타기 전 화장실 찾기는 왜 이리 어려운 거야. 겨우 찾으니 1유로를 내야 한다니! 할 수 없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냈다.
황급히 떠나는 사람들 사이로 기차를 찾았다.
본격적으로(?) 순례길을 시작하러 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