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귀찮아질 때가 있다. 좋아하던 것도 시들해지고 싫어하던 것도 잠잠해진다. 귀찮음이라는 것은 다른 어떤 감정보다도 야만적이다. 주변에 있는 모든 감정은 명도나 채도에 상관 없이 꿀꺽 삼켜지고 만다. 남는 것은 귀찮다는 감정 하나뿐이다. 그 어떠한 것이 트리거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어쩌면 죽음과 가장 가까운 감정이 아닌가 싶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 사실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은 꽤 많은 에너지를 써야만 하는 일이다. 좋아하는 것을 쉽게 말하지 못하는 나같은 인간은 더 그렇다. 하지만 어떤 것을 싫어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진빠지는 일이다. 귀찮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대충 뭉뜽그려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내동댕이친다. 그럴 때면 내팽개쳐진 채로 가만히 숨만 쉬고 있는 것이다.
한 순간에 낡아버린 몸을 끌고 냉장고를 열었다. 재료야 있지만서도 감히 무언가를 할 수 없는 기분이다. 짜장면이라도 시켜 먹을까 싶지만 요즘 세상에 짜장면 한 그릇을 배달해주는 곳은 없다. 이럴 때면 옛날 생각이 나고, 옛날 생각이 나면 어째 늙어버린 기분이다. 커서 짜장면과 짬뽕을 동시에 먹으면서 ㅡ짬짜면이 아닌, 한 그릇씩ㅡ 군만두까지 시키리라 스스로 약속했던 적이 있다. 어른이 된 인간은 그럴 돈은 없다며 과거에게 손사래를 친다. 아니 그렇게 다 주문하더라도 이제는 소화할 여력이 없다. 마음만 낡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라면을 집었다. 수돗물을 받고 스프와 후레이크와 면을 동시에 넣고 불을 올린다. 스프가 먼저니 면이 먼저니 싸울 여력은 없다. 그저 의자에 폭삭 주저앉는다. 라면을 살 때는 후레이크가 있는 제품을 산다. 야채 쪼가리들을 말려 놓은 것이라곤 하지만, 없다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다. 뭐랄까. 어떠한. 삶이 귀찮아져버리고만 인간의 최소한의 자존심이라고 해야 할까.
라면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실 라면을 먹으면 그렇게 허기가 질 수가 없다. 몇 젓가락을 입에 쑤셔 넣고 국물을 조금 마신다. 끓이는 데 삼 분이 걸린다면 먹는데는 일 분이나 걸릴까. 그릇 씻기도 귀찮아 싱크대에 대충 던져둔다. 그러고나면 분명히 음식을 먹었는데 배가 고프다. 나는 라면을 먹었고, 공허함은 나를 집어 삼켰다.
귀찮지 않은 날에도 마찬가지다. 라면을 먹으면 헛헛하다. 그 묘한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 파도 썰어 넣고, 고춧가루도 뿌려 보고, 계란을 올리기도 한다. 그냥 먹는 것보다야 괜찮지만서도 여전히 라면은 허무한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알수가 없다. 가끔은 손을 들고 질문하면 친절하게 답해주는 담임선생님이 어른에게도 필요하다.
아, 라면이 맛있을 때도 있다. 같이 먹는 라면. 사람과 같이 먹는 라면. 그것은 후레이크 없는 라면이라도 충분히 맛있다. 소세지나 양파 같은 것을 굳이 넣지 않아도 맛있어져버리는 것이다. 나는 혼자 먹을 때와 함께 먹을 때의 편차가 이렇게 큰 음식을 본 적이 없다. 혼자 먹는 라면은 음식이 아닌 걸까. 그냥 인간이라는 단백질 기계를 가동시키기 위한 연료를 위장에 채워 넣는 걸까.
라면, 라면. 꼬불꼬불 꼬불꼬불 맛좋은 라면. 후루룩 짭짭, 후루룩 짭짭 맛좋은 라면. 생각해보면 라면이 맛있다고 노래를 부르던 것들도 혼자가 아닌 것이다. 둘리며 마이콜이며 도우너며 또치와 희동이인 것이다. 나는 혼자다라는 생각이 들 쯤에 이제 다시금 귀찮아져버리고 만다. 다시 나의 의식은 0에 가까운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