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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지호 Aug 19. 2024

아주 쓸데없이 현학적인 척 하는 글을 쓰고 싶을 때면

그럴 때가 있다. 쓸데 없이 어려운 글들을 풀어내고 싶을 때가 있다. 말도 안 되는 말들을 적어 두고는 당신의 해석에 달렸다며 무심하게 지나치는 그런 글을 쓰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글은 꼭 그런 것이다. 예를 들면 굳이 길을 글게 늘여 쉼표를 넣고 아니면 ㅡ인지 -인지 끄적일 때마다 헷갈리는 것을 구태여 글 속에 넣어 보는 것 말이다. 아니면 옛날 문인들마냥 K이니 Y이니 하는 것을 이름으로 짓고 사실 이름이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홀로 히히 웃는 것이다.


아니면 또 그런 것이다. 요즈음의 인생은 어느정도의 적색편이다, 라는 말로 대뜸 적어 놓고는 적색편이가 무엇인가를 검색하는 것이다. 별이 멀어지면 적색으로 관찰된다는 것을 읽고는 - 대게 그런 것은 나무위키에 의존한다 - 혼자 의미부여를 하고 낄낄 웃는 것이다. 나는 당신들에게서 멀어졌고 ㅡ 어째 그러고 나니 당신들이 적색으로만 보이는 것이고 ㅡ 그래서 결국 우리는 서로를 오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쓸데없이 현학적인 척 하는 글을 쓰고 싶을 때면,



요즈음의 인생은 어느정도의 적색편이다. 떠나올 때 받았던 글의 한 구석엔 나는 새로운 세상에서 또 다른 좋은 연을 만날 것이라는 부담스러운 암시가 있었다. 내가 여기 와서 만나 번호를 얻었던 지인의 카카오톡 상태 메세지에는 - 기실 카카오톡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어째 목줄을 달고 기둥을 빙빙 도는 개와 같은 것이다 - 두개의 세상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말이 써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꽤나 무너져버린 것이다. 나는 그러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구태여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인데. 바라만 보는 것은 사실 포용한다기보다는 무시하는 것에 가깝고 말아버리고 만다. 목적지야 같지만서도 어째 아주 달라져버리고 마는것이다. 멀어지다보니 S가 적색으로 보인다. 그런 것은 열두시간을 내달려 다시 생각해보면 S는 나를 아주 선명한 적색으로 보고야 만다는 것이겠다.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거리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이 가까워진다면, 나는 어찌해야할지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다. S가 붉지 않았구나, 라는 말을 건내야 하나 아니면 사실 나도 붉지 않았다, 라고 해명해야 하나. 그래서 나는 다시금 비행기에 타는 꿈을 잠시 접어두고 아주 현학적인 글을 - 사실 나도 의미를 알 수 없는 - 쓰고는 밥이나 먹는 것이다. 밥이나 주워 먹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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