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구공오 Apr 13. 2020

12월이 되면, 축제를 열자!

방송부로서의 빛나는 순간


우리 고등학교는 불에 달궈진 군고구마가 노란 속살을 드러낼 때, 항상 축제를 열었다. 열심히 달려온 일 년을 마무리하는 것을 정말로 중요하게 여겼던 터라 그 1년의 결과물을 보여줄 축제를 2~3일 정도 할 정도로 축제는 내 고등학교 친구들, 후배들, 선배님, 선생님 모두에게 일 년 중 가장 큰 행사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속한 방송부 또한 우리가 비밀스럽게 흘려온 땀, 노력 그리고 영상에 대한 열정을 축제 영상으로 마무리 짓는 날인 동시에, 또 다른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함께 활동을 해온 선배님들과 때론 후배님들과 작별인사를 하는 슬픈 날이기도 하였다.






2학기가 되면, 축제 10~20분 영상을 제작해야 하는 일에 다들 몰두하였다. 수많은 아이디어가 오고 가고, 또 실행되다가 엎어지고, 그 과정들 속 자신이 낸 아이디어가 허탈하게 사라지는 모습은 방송부원 모두에게 큰 상실 또는 불만으로 다가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의견이나 아이디어가 반대되는 순간에 참 마음 한 구석이 울쩍 해지는 건 마찬가지이다. 제작하는 일을 지망하는 사람들에겐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시작을 참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내 아이디어가 남에게 환영받지 못했다는 쓰라림이 마음 한 구석을 슬프게 만든다. 하지만, 모든 아이디어는 다른 사람과 부드러운 충돌을 할수록 좋아지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투박한 원석이었던 아이디어가 여러 사람이 의견과 행동으로 조각하여 만든 완성 물이 곧 대중 앞에 서게 되는 거니까.



 하지만, 고등학교 때는 각자의 개성과 의견이 너무나도 강력했기에, 부드러운 충돌을 하긴 너무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불만이 쌓이고 쌓여 ‘내 의견은 반영도 안 해주는데, 내가 참여해서 뭐 하겠어?’라는 못된 심보를 갖게 되었다. 또한, 그 반대 편에 있는 사람은 ‘쟤는 왜 이리 열심히 참가하지 않는 거지?’라는 불만을 갖게 되었고.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못된 마음과 불만을 갖고 있는 초 예민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나도 물론, 이러한 고난을 겪었다. 좋은 의견이라고 모든 방송부원이 동의하였지만, 어느새 내 아이디어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 그때마다, 상실과 불만을 품었지만, 제일 무서웠던 건 내가 참여하지 않았다고 친구들이 불평할까 두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난 아이디어를 내는 것보단 실행시키는 것에 역할이 있으면, 자처를 하는 쪽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축제 영상 제작에 대해 큰 관여를 하지 못하였다. 그냥 작은 스태프 역할만 했을 뿐. 큰 도움은 주지 못한 채 난 축제 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축제 당일 날, 난 방송실에 가는 것이 참 꺼렸다. 내가 도움을 줄 것도 없는데, 괜히 가서 지금까지 작업하는 친구들과 선배들을 방해하는 것이 아닐까 란 고민을 하면서 일말의 죄책감을 가졌다.





 1학년 때, 관련 재밌는 에피소드를 풀자면, 축제 때 방송실을 가는 것이 너무 어려웠던 난, 차라리 축제를 즐기자고 생각했다. 단, 방송부원들에게 들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내 반 친구들은 각자 동아리 활동으로 바빴기 때문에, 누군가와 같이 즐길 여력을 없었고, 그저 혼자서 먹거리 장터, 동아리 활동 보고서, 미술부 전시회 등을 돌아다니며 조마조마한 마음과 함께 나름대로의 축제를 즐겼었다. 그리고, 반 친구가 자신이 연극 무대에 서게 되었다면서 꼭 시간에 맞추어 보러 오라는 것이었다. 그 약속을 잊지 않은 채 난 연극부의 ‘죽은 시인의 사회’ 연극을 보기 위해 맨 첫 번째로 줄에 서있었다. 굉장히 찬바람이 쌩쌩 부는 날씨였기에, 손을 덜덜 떨면서 기다렸지만, 연극부 스태프들은 관객은 아직 출입금지라면서 들어가게 하지 않았다. 5분 후, 문이 열리자 이제 들어갈 수 있겠구나라 생각했던 곳에선 방송부 2학년 국장 선배가 나오는 것이었다. 눈 앞에서 딱 마주쳐 버렸다. 머릿속에선 ‘와… 나 연극 보러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란 변명거리를 찾으려 바빴는데, 선배가 날 보자마자 꺼낸 말은 사뭇 달랐다. 



‘혹시, 연극 촬영하러 왔어?’

‘아니요… 전 그냥…’

‘캠코더 촬영하러 온 거지? 맞지? 역시 촬영하러 왔구나. 나 지금 축제 영상 편집 마무리 안 해서 정말 바쁘니까, 연극 촬영 부탁해! (촬영하러 온 거라 억지로 라도 말해 란 다급한 표정과 함께)’

‘선배! 저 연극 보러 왔는 건데.’

‘파이팅!’



나의 아니란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무지 급한 표정으로 촬영을 떠넘긴 채 쌩 달려간 선배와의 짧은 대화는 참으로 황당했다. 그 대화를 본 연극부 스태프 역시 당황한 기력을 감추지 못한 채 나에게 ‘아… 촬영하러 온 분이었군요. 들어가세요.’라고 하며, 들여보내 주었다. 연극부 친구들은 ‘네가 찍으러 와줘서 다행이야.’란 이야기를 나에게 건넸기 때문에, 전에 상황에 대한 언급은 일절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연극부 친구들이 1년을 가까이 준비해온 무대인 만큼 열심히 찍어주는 것이 나 에게도 그들 에게도 보람차다고 느꼈다. 





보람이 찬 일이 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먹거리 장터와 연극, 길거리 공연 등이 끝나고, 전교의 학생들은 큰 강당에서 방송부의 영상과 장기자랑을 관람하는 것이 절차였다. 그때부터, 방송부 학생들은 맨 뒤에서 관람하는 학생들의 모습과 반응을 찬찬히 살펴본다. ‘과연 우리 영상이 그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줄 수 있을까?’란 질문과 떨림을 잔뜩 안은 채. 그때의 순간을 기억해내라고 하면, ‘긴장’이란 단어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영상 소개를 하기 위해 무대에 서는 순간부터, 무대 인사를 하고 내려온 뒤 영상을 트는 것까지 손이 덜덜 떨리고, 가슴이 벌렁벌렁하다. 당장이라도 유리창을 깨고, 그 강당에서 나가고 싶을 정도로 긴장과 떨림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영상이 틀어지는 순간에 모든 것을 놓아버리게 된다.  



대부분 고등학교 방송부의 축제 영상은 ‘재미’로 주제가 정해진다. 학우들이 우리 영상을 보고 즐거워하면 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대부분이 인기 있거나 널리 알려진 광고, 프로그램 등을 축제에 맞게 패러디하는 영상이었다. 하지만, 나의 방송부 축제 영상에서 제일 기억에 남았던 것은 2년 연속 제작한 단편 공포 영상이었다. 축제에 공포라는 것이 잘 안 통할 줄 알았지만, 예상 밖이었다. 처음 ‘light out’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만든 감독의 짧은 영상을 학교라는 바탕으로 리메이크 한 영상은 마지막에 귀신을 정면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먹혔다. 제발 이 장면에서 놀래 주었으면, 한 곳이 의도대로 되니 그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제작한 영상을 보고 웃고 즐거워하는 친구들을 보면, 이때까지 날 세워가면서 만든 영상들이 정말 가치가 있고, 힘들었던 감정들이 물 흐르듯이 씻겨 내려간다. 이게 바로, 제작자들이 다음 작품을 준비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구나 란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무한도전을 보고 환한 웃음을 지었던 것처럼 김태호 피디도 매주 토요일 저녁 6시 시청자들의 웃음을 보기 위해 10년간 달려올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제작자들은 대중들이 자신의 작품을 보고 감정을 즐기는 마지막 순간을 위해 긴 여정을 잘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방송부원으로서 가장 짜릿하고 보람찬 순간을 뽑으라면, 바로 축제 영상이 학우들과 만나며 서로 교류하는 그때를 뽑을 수 있다. 1년 동안 열심히 뿌렸던 씨앗들이 자라, 수확을 거두는 시기를 나의 고등학교 방송부는 한 겨울에 학우들의 즐거운 순간들로 열매를 수확한다. 그렇기에 1, 2학년 때는 축제를 잘 못 즐겨 3학년이 되어 친구들과 처음이자 마지막 축제를 즐겼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난 즐기는 쪽도 물론 좋지만, 제작한 작품을 관람객들과 만나는 순간을 더 사랑한다. 고등학교 방송부 활동을 하면서 이미 그 짜릿한 맛에 중독되어 버린 게 아닌가 란 생각이 든다.





달콤한 조각 케이크 뒤엔 씁쓸한 아메리카노로 입을 중화하듯 학 학년 위의 선배, 후배와의 이별과 새로운 만남이 찾아온다. 그땐 왜 저렇게 미워했을까 하던 선배, 후배도 이별이 되니 미운 정이 들었는지 마음이 뭉클 해진다. 인생 50년을 넘게 사는 우리 아버지도 항상 하는 말이, 세상에서 안 슬픈 이별은 없다고 하신다. 성인이 된 지금도 방송부, 고등학교, 나의 10대, 학창 시절 등 무수한 이별을 겪고 자랐지만, 적응이 잘 되지 않는다. 그때도 이별은 나에게 참, 쓰디쓴 삼킬 수 없는 커피였다. 뱉고 싶지만, 새로운 달콤한 만남을 위해 참아야 하는 인내심이 필요한 이별이었다. 




다들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 짜릿하고 보람찬 순간이 오고, 만남의 새로운 시작이 오고, 슬픔이 어린 이별의 순간이 오지만,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그 현재의 감정이 어떻든 진하게 즐겼으면 좋겠다. 한때의 감정의 순간으로 우리는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때 어설프게 즐기어 과거 또는 미래에 내 마음이 묶여 있는 것보단, 지금을 잘 즐겨 앞으로의 놓칠 수 있는 순간들을 잘 잡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밤이 되면, 떠올리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