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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ngyouth May 03. 2019

프로파간다 영화여도 충분히 흥미로운

<변경>(1933)

어째서인지 사랑과 혁명을 이어내는 이야기들을 유독 많이 접하고 있다. “오래된 새로움의 도래”로 재등장한 사랑이 정치적인 것과 관련해 어떤 길을 낼 수 있을지 권명아(2011)가 고민하던 것은 스레츠코 호르바트(2015)가 “사랑의 급진성”을 이야기함으로써 어느 정도 윤곽화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다. 급진성은 물론이고 위험성까지 공유하고 마는 사랑과 혁명은 보편성의 차원에서도 서로 맞닿아 있다. 소비에트 연합의 영화 <변경>(1933)은 바로 이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영화다. 사랑과 혁명을 잇는 담론들이 다시금 이야기되는 와중에 보게 된 영화 <변경>은 이 담론이 오래됐음에도 여전히 낡지 않은 유효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영화였다.    

     

<변경>의 이야기는 중층적이다. 독일과 대치하는 러시아 군인의 전쟁 이야기가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면, 다른 한 축에는 러시아 본토 내부에서 피어나는 로맨스가 있다. 전장과 본토로 분절된 두 공간은 군화를 통해 서로 이어지게 된다. 영화의 초반서 파업의 현장으로 등장했던 신발공장은 군인들에게 군화를 보급하는 계약을 따냄으로써 다시금 노동이 착취되는 곳으로 변모하고 만다. 기민하게 보자면, 공장장 자본가와 군인 참모가 각각 탐욕스러운/교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계약을 성사시키는 바로 이 장면에서 <변경>이 고발하려는(전달하려는) 바는 확정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전쟁이 지속됨으로써 공장은 계속해서 자본을 축적할 수 있게 되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깨부술 것인가. 영화는 전쟁을 멈춰내는 것은 물론 자본의 착취로부터 벗어나는 두 가지 목표를 모두 이뤄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전쟁이나 로맨스는 기실 혁명의 필요를 위한 장치임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변경>은 혁명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프로파간다 영화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프로파간다임을 감안하더라도 <변경>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일단, 비록 혁명이라는 더 큰 과업을 위해서이긴 해도 전쟁을 대하는 <변경>의 태도는 충분히 유의미하다. 적군을 적대적으로 그리기보다 전쟁의 비극성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태도로부터 반전(反戰)의 성격을 강화해낼뿐더러 전장 속에서도 빛바래지지 않는 인간성을 이 영화는 포착해낸다. 이로부터 민족 국가 간 전쟁은 비극적인 것으로 나아가 무의미한 것으로 그려진다. 물론 이는 “모든 민족의 평등한 우호관계”를 지향함으로써 세계혁명을 꿈꾼 소비에트 연합의 프로파간다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본토에서 피어나는 로맨스의 씨앗은 바로 저 전장의 휴머니즘으로부터 뿌려졌다는 것 역시 흥미롭다. 포탄이 빗발쳐 흙먼지가 휘날리는 전장 속에서 러시아 군인은 독일 군인을 죽이기보다 살려냈고, 그들 근처에서 폭탄이 터질 때에는 러시아 군인은 독일 군인의 생존을 염려하기까지 한다. 살긴 했으나 포로 신세를 면할 수는 없는 독일 군인은 러시아 본토로 보내진다. 이 생존한 독일 군인과 러시아 여자 사이에서 로맨스가 싹트게 되고 바로 여기서 민족과 인종을 뛰어넘는 ‘사랑의 보편성’이 드러나게 된다. 이 사랑의 보편성은 혁명 역시도 민족과 인종 따윈 괘념치 않는다는 혁명의 보편성으로 이어진다. 전장에서 확인되는 형제애나 인류애와 같은 은유로서의 사랑뿐만 아니라 본토에서의 독일 군인과 러시아 여자 사이의 성애와 같은 직유적 사랑 모두가 보편성을 획득함으로써 사랑과 혁명은 보편성의 차원에서 아주 많이 닮은 것이 되어버린다.          


포로로 잡혀온 이 독일군에게 신발을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는 노골적인 설정이 더해지면서 이 독일군 포로의 독일이라는 정체성은 벗겨지고 노동자라는 더 중요한 정체성이 부여된다. 노동자가 된 이 인물이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러시아 사람들에게 린치를 당하는 장면이 제시되고, 전장에서 아들이 전사했다는 러시아 남자가 독일인-노동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막아주는 다소 낯간지러운 장면이 이어지면서 프로파간다 영화는 자신의 의도 -민족을 초월한 프롤레타리아의 연대- 를 여실히 보여 낸다. 비록 프로파간다임이 명백하지만 그것이 그리 거북하지 않게 다가오진 않는데, 프로파간다는 버거울지언정 사랑은 그렇지 않기 때문일 테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닮은 혁명을 보여 내는 <변경>은 프로파간다 영화이면서 동시에 흥미로운 로맨스 영화로도 읽히게 된다. 그리고 순환논법처럼 혁명은 사랑을 닮아야 한다는 당위성까지 확보하게 되는 영화로서 <변경>은 자리 잡게 된다.        


공간적으로 분절된 <변경>의 두 이야기는 최종 목적인 하나의 혁명을 위해 합쳐질 준비를 한다. 앞서도 언급했듯 두 이야기는 소재적으로는 군화를 통해 연결되고, 전장의 독일군이 본토에서 노동자로 재정체화 됨으로써 인물을 통해서도 연결된다. 더 중요하게는 사랑이라는 테마가 두 이야기를 휘감고 있다. 두 공간에서의 두 이야기가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됨으로써 영화는 자연스레 연결의 욕망을 자아낸다. 연결되고자 하는 두 이야기를 이어내는 것은 당연히도 편집의 몫이 될 수밖에 없고, 이때 몽타주 편집 기법은 이 욕망을 효과적으로 충족시킨다. 착취적 노동을 수행 중인 신발공들이 등장하는 장면에 이어 러시아 군인을 향해 총탄을 쏘아대는 적군의 모습이 이어지고, 전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이 곧바로 제시된다. 재봉틀의 기계운동과 기관총의 기계운동이 비슷한 운동 이미지를 띤 채로 몽타주되면서 착취당하는 노동자와 목숨을 위협당하는 군인들이 조응하게 된다. 이와 같은 몽타주 편집이 의도하는 것이 무언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포착된다.


전장의 착취와 본토의 착취가 드러나게 되면서, <변경>은 전쟁에 거부하는 러시아 군인의 모습을 등장시키고, 자본가와 관료에 저항해 전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등장시킨다. 비록 전장에서 이 러시아 군인은 배신자로 낙인찍혀 총살되지만, 본토에서 연대하고 전진하는 사람들의 혁명이란 것은 성취될 기미를 보인다. 독일군 포로였던 노동자는 물론, 독일군의 로맨스 상대였지만 아버지에 의해 사랑이 좌절된 러시아 여자가 아버지의 체스판을 내팽개치면서 본토의 혁명 연대에 합세한다. 이들의 전진적 혁명이 성취될 것이란 것은 그들이 짓고 있는 미소를 통해 확인된다. 그리고 <변경>은 본토에서의 장면에 뒤이어 러시아 군인의 모습을 배치함으로써 몽타주 편집으로 또다시 두 이야기를 이어낸다. 이로써 혁명 연대에 참여한 사람들의 미소가 죽어가는 러시아 군인의 얼굴로 전염되고, 비록 러시아 군인은 죽어가지만 꽤나 숭고한 희생처럼 그려짐으로써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 군인이 유언처럼 남기는 "돌진"은 전장에서의 그것이 아니라 본토에서의 혁명을 가리키는 것임은 명백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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