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선택의 이유> 세 번째 인물_여행사 마케터 최수현
여러 번 상상하다보면 실제로 만난 적 없는 이에게서 친밀감마저 느끼는 경우가 있다. 언젠가 한번쯤 만난 것처럼, 일면식 없는 상대에게 그리운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경험. 스페인 근교 해안가 절벽에서 혼자 레모네이드를 팔고 계신다는, 푸근하고 친근한 아주머님이 나에게는 그런 존재이다. 그 분은 비자 갱신을 위해 잠시 한국에 들어온 여행사 마케터 최수현 님이 들려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다.
수현 님은 매주 목요일마다 13시간짜리 스페인 근교 투어를 진행하는데, 자유시간이 되면 해안가 절벽에 있는 레모네이드 가게에서 쉰다고 했다. 하루는 피리 부는 가이드가 되어 열 댓명의 여행자를 우르르 몰고 그 가게를 찾았는데, 생전에 만난 적 없는 '단체 손님'에 주인 아주머님은 여러 개의 레몬을 착즙하느라 진땀을 뺐다고 한다. 여행자들은 ‘가이드 인증 맛집’이라며 모두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들고 동네 구경에 나서는 와중에, 아주머님은 가이드인 수현 님을 붙잡고 연락처가 적힌 메모를 주며 다음엔 미리 알려달라고 당부하셨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수현 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갔고, 그 일화는 진한 잔상을 남겼다. 빛 바랜 비치 파라솔이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 매일 같은 위치에 걸려 있다 아침마다 풍채 좋은 주인 아주머님 허리춤에 노련하게 매듭지어지는 앞치마, 레몬이 으깨지면서 피어나는 시트러스 향기, 절벽 아래까지 파도가 싣고 온 바닷 내음...키오스크 기계에 터치만 하면 5분도 채 안되서 커피 여러 잔을 받을 수 있는 이 곳과는 완전히 다른 곳. 코로나19가 아니었으면 바르셀로나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만들었을, 그림 같은 풍경이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도시, 한번쯤 가보고 싶은 장소가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날씨가 좋은 적기에 휴가를 갈 구실을 만들거나, 신혼 여행지로 그 곳을 택하지 않을까?
오늘은 태양의 도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여행사 마케터로 살아가고 있는 최수현 님을 지면에 모시려고 한다. 그녀와의 인터뷰는 서면으로 4차례 진행했다. 수현 님에게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되는 과정은 어땠는지, 자신을 뒤흔드는 불안감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직업이 가져다 주는 행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묻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단디 : 안녕하세요. 수현 님! 바르셀로나는 요즘 어떤 분위기인가요? 연일 뉴스에서 코로나19 사태로 가장 강력한 봉쇄조치가 시행되는 도시로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가 보도되더라고요.
수현 : 길거리에 사람도, 차도 없으니까 아침마다 새 지저귀는 소리가 거의 서라운드 음향급으로 들려와요. 평화 그 자체예요. 바깥 활동에 제한은 있지만 주민들 대부분 관광업에 종사하다 보니 각자 상황에 맞게 휴식하는 분위기예요.
단디 : 바르셀로나 같은 세계적인 관광 도시에 사는 현지인들은 살면서 다시 만나기 힘든, 조용한 시기가 아닐까 싶어요.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수현 님을 어떻게 소개하면 좋을까요?
수현 : 제 직업을 가장 재미없게 소개하면 여행사 마케터예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여행사 본사에서 마케팅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매주 목요일마다 13시간짜리 근교 투어로 여행자분들을 직접 만나기도 하죠. 마케터이자 때로는 가이드인 셈이죠. 하지만 저는 이 일을 마케팅이라기보다 여행 문화를 기획하는 일이라고 여겨요. 어떻게 해야 기존 투어의 틀을 깨면서 만족도를 높일 수 있을까 고민하거든요.
단디 : 그럼 여행 상품 기획부터 가이드까지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하고 계신 건가요? 여행업에 종사 중이셔서 코로나 사태의 영향을 절감하고 계실 텐데 업무는 어떠신가요?
수현 : 코로나 사태로 취소되는 모든 예약을 처리하느라 한동안 정신없기는 했어요. 이제 막 시작한 스타트업이다 보니 투어 코디부터 CS, 인사, 행정, 가이드 등 모든 파트에 업무가 걸쳐져 있거든요. 하지만 올해에는 마케터로서 입지를 굳히려 하고 있어요. 코로나 사태를 기회로 삼아 지난 1년 동안 현업에 치여 못해본 시도를 할 수 있어 좋아요. 요새 집중하고 있는 작업 중 하나는 구매 직전에 어떤 장치가 있어야 구매라는 액션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과 애널릭틱스 분석에 맞춰져 있어요. 결과는 추후에나 얻을 수 있겠지만 꽤나 재미있는 작업이라 즐겁게 하고 있어요.
단디 : 다행이네요. 스페인을 가본 적도 없었지만 스페인어를 공부했고 바르셀로나에 살고 계신 걸로 알아요. 어떤 계기로 스페인을 택하게 됐나요?
수현 : ‘한국에 너무 오래 살았는데 다른 나라에도 살아봐야 하지 않나? 한국에만 있긴 아쉽지 않나? 마침 스페인어를 할 줄 아니 스페인어권으로 가자’ 하는 심플한 결정이었어요. 스페인어를 배우게 된 계기는 제3외국어 자격증이 학부 졸업요건이라 시작한 건데, 신기하게도 입에 착착 달라붙더라고요. ‘그럼 대체 목표도 없이 거기를 왜 갔냐’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죠. 제가 왜 스페인을 택했는지는 설명하기 참 어려운 것 같아요. 특정한 무언가를 바라서는 아니었거든요. 근데 저는 원래 목표 없이도 잘 돌아다녀요. 모든 일에 이상을 세워 놔야 하나요? 이상과 현실은 한 끗 차이라 생각해요. 움직이지 않으면 이상, 뭐라도 시도하면 현실. 전 이상을 꿈꾸는 사람이기보단 직관을 따라 움직이는 스타일이에요. 특정한 목표 없이 이곳에 왔지만 살면서 목표들은 저절로 생겨나고 있어요. 새로운 시도를 계속해보고 싶어서 바르셀로나에 사는 것 같아요.
단디 : 와우! 명쾌하네요. 학부가 문화관광학과셨잖아요. 이렇게 여행업에 종사할 꿈을 갖고 대학 전공을 선택했던 건가요?
수현 : 그건 전-혀 아니에요. 그저 색다른 걸 배우겠다 기대하고 문화관광학과를 선택했죠. 문과 계열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전공 아시죠? 국어국문, 불어불문, 경제, 아동복지, 심리, 법학, 철학.... 이름만 들어도 무섭지 않나요? 예전에 저는 이런 학문에 대한 편견이 있었죠. 하잘 데기 없이 지루한 것을 배운다고 말이에요. 지금 다시 보면 진짜 아름다운 학문들인데.... 가기 싫은 과들을 다 지우고 나니 문화/관광/예술 관련 학과들만 남더라고요.
단디 : 한국에서는 대학 입시에 들이는 공에 비해서, 학문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나 환경이 수험생에게 충분히 제공되지는 않는 듯해요. 입시설명회도 입시 '전략'을 설명하는 자리니까요. 요즘도 철학과에서 배우는 건 철학관이랑 다르다는 우스갯소리가 종종 예능에서 나오더라고요. 막상 대학에 들어가면 많은 학우들이 전공 불문하고 '전공을 살려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압박이나, '이걸 배워서 어디다 써먹지' 같은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수현 님은 어떠셨나요?
수현 : 이건 조금 냉정하게 답하고 싶어요. 예전부터 안타까웠거든요. 왜 모든 목표가 다 취업으로 가야 하나요? 취업하면 인생 목표 달성인가요? 무엇보다 전공이라는 이름 안에 갇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문화예술을 전공했으면 미술관, 공연장, 축제, 항공사 등에서 일해야 한다는 생각이요. 최근 코딩 공부를 시작했는데 코딩의 핵심은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더라고요. 결국 생각하는 힘이 제일 중요하다는 거죠. 전공은 아이디어의 창의성, 독창성을 올려주는 역할을 하는 거에요.
단디 : 저도 격하게 공감합니다. 실제로 문화관광학과 졸업생의 커리어 패스를 추적해보면 무척 다양해요. 농산물 유통, 게임회사 인사팀, 퍼포먼스 마케팅, 부동산 가치평가사, 의류회사 전략기획실 등이요. 근무지가 미술관이냐 호텔이냐의 문제가 아니죠. 예전에 학과 공식행사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본 전공의 힘은 '추상적인 가능성을 땅까지 끌고 내려와 실현해내는 것에 있다'라고 말했어요. 이상을 실현해내기 위한 심미적/고객지향적/분석적인 사고를 학부에서 학습했으니, 본인만의 색과 합쳐지면 해낼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고. 물론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말을 20대는 제일 어려워하고 저도 그랬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죠.
수현 : 맞아요. 전공수업에서 배운 이론을 하나라도 삶과 업무에 적용시킬 수 있다면 그걸로 대학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봐요. 배움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어요. 우리가 배운 전공은 모두 우리 삶에 유용하니까요.
단디 : 학부 때 특정 직무를 계획하고 준비하셨던 게 아니라면, 중간에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셨을 텐데요. 요즘 덕질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덕업 일치라는 말이 더 자주 보이더라고요. 수현 님도 한창 맥주와 영화에 빠져 계시지 않았나요? 맥주 덕후, 영화 덕후였잖아요.
수현 : 맞아요. 영화와 맥주를 탐미했던 적이 있어요. 근데 덕후의 자질은 얼마나 오랫동안 그 관심사를 유지하는지가 포함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관심을 길게 유지한 게 아니라서 덕질이라고 말하기 조심스럽네요. 대신 한번 관심이 생기면 빠르게 파고드는 편이에요.영화를 볼 때는 방 안에서 꼼짝도 안 하고 하루에 4-5편씩 봤어요. 그때는 체력이 깡패였나 봐요. 무자비했죠. 영화를 다 보고 영화관을 나왔을 때 모든 것들이 낯설게 다가오는데 그 느낌을 좋아해요. 여행처럼요. 그런 점에서 영화는 나의 세계를 재인식할 수 있게 도와주는 효율적인 매개체 같아요. 맥주도 마찬가지였어요. 하루 한 병씩 새로운 맥주 마시기는 당연했고, 한 달만에 100종류 이상의 크래프트 비어를 마시기도 했어요.
단디 : 저는 수현 님이 맥주왕이 될 줄 알았어요. 저를 크래프트 비어 세계로 초대한 것도 수현 님이고. 한동안 맥주를 제대로 즐기려고 이태원 크래프트 비어 바에서도 일하셨잖아요. 그때 일은 어떻게 시작했어요? 일하는 동안 재밌는 일도 많았을 것 같아요.
수현 : 선명히 기억해요. 당시 저는 1.6리터짜리 페트병에 담긴 맥주를 노트북 옆에 두고 전공 리포트를 쓰곤 했어요. 근데 계속 같은 맥주만 마시다 보니 지겹더라고요. '더 맛있어질 수 없는 건가, 이 맥주란 녀석?' 그러다가 맥주 덕후가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를 알게 됐고 운영자들이 이태원에 크래프트 비어 바를 연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일을 시작했어요. 재미있었던 일들은 정말 많아요. 무엇보다 징글징글한 덕후들을 만났던 게 가장 소중한 경험이죠. 끈질기게 뭔가를 파고드는, 그 견딜 수 없는 열정의 끝판을 그때 봤어요. 어느 한의사 분은 한방 약재를 넣은 맥주를 양조하기도 하고, 맥주 마시겠다며 바 사장님은 애호가들 모아서 미국으로 2주간 맥주 여행을 떠나고, 디자인을 전공한 친구는 작성하기 편한 맥주 시음 기록 표를 만들고...그 사람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죠.
단디 : 그 한의사 분은 저도 만났던 것 같은데... 주머니에서 공연 티켓도 수십 장 꺼내서 보여주셨던 걸로 기억해요. 덕질을 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몰입할 줄 아는 사람임을 의미하죠. 그런데 왜 맥주는 업으로 연결이 안 됐다고 생각하세요?
수현 : 체력적인 한계를 많이 느꼈어요. 수제 맥주를 만들려면 맥아 포대를 옮긴다든지, 맥주 케그를 두 손으로 번쩍번쩍 들어야 한다든지 힘을 써야 하는 일이 많아요. 제가 맥주를 만들겠다고 하면 '너 이거 할 수 있어?'라는 반응을 자주 만났죠. 의욕이 떨어지더라고요. 근데...사실 이거 다 핑계예요. 맥주를 깊이 사랑하지 않았던 거뿐이죠.
단디 : 아, 이 담백한 솔직함! 그럼 수현 님에게 있어서 맥주, 영화 그리고 스페인어. 3가지의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요? 덕업일치로 가는 갈림길에서 어떤 동기가 작용했기에 하나는 업으로 삼고, 두 가지는 취미로 남았을까 궁금해요.
수현 : 3가지의 차이점이라... 어떤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 제 마음가짐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덕질에서 몇 가지 장애물만 넘기면 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거든요. 예를 들어 사업자등록이라던지, 비자신청, 수업 완강 등 같은 필수적인 장애물이요. 저같은 경우에는 스페인어가 재미있었고 몰입이 잘 됐어요. 2~3살정도 되는 아기들이 배울 만한 스페인어 동요를 하루종일 흥얼거렸죠. 스페인어 자격증은 1년 정도 준비해서 B2 레벨을 취득했어요. 자격증 취득이 장애물이자 하나의 동기가 됐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DELE는 스페인 정부에서 발급하는 공인 자격증으로, 레벨은 A1<A2<B1<B2<C1<C2(최상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한국에서는 서어서문학과((스페인과 중남미에서 쓰여지는 언어와 문학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학문) 전공자 졸업요건이 B1~B2 정도 되고 취업 시에도 보통 B2 이상을 요구한다. 한국에서는 서울(외대), 대구(대구 가톨릭대)에서만 응시할 수 있다.
단디 : 이쯤 되니 수현 님에게 직업, 또는 일을 통한 행복의 의미가 궁금해집니다. '한국'이라는 사회 전체를 저 개인이 감히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제가 느끼는 한국은 개인이 성취해야 하는 사회적인 지위, 직업에 대한 기대치가 매우 높은 나라예요. 2019년 3월,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진행한 설문에서 직장인 중 72%가 '항상 자기 계발을 해야 한다'라고 답했데요. (꺅!!) 월평균 17만 1,000원을 자기 계발비로 지출하고요. 업을 통한 행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수현 : 음, 글쎄요. 우선 '직업'을 통한 행복이 존재하나요? '일'을 통한 행복이라 하면 과제를 설정하고 그걸 이뤘을 때 느끼는 성취감이 있잖아요. 이건 직업이 없어도 느낄 수 있는 행복이고요. 직업이 줄 수 있는 행복은 소속감과 금전적인 보상 정도가 아닐까요. 아! 하나 더 있긴 해요. 직업이 있으면 한국에서 내 소개가 간단해져요. 우린 처음 만나면 직업을 자연스레 물어보잖아요. 직업이 없으면 곤혹스럽죠. 답변을 못하면 왠지 내 존재가 위협받는 느낌이고요. 스페인에 살면서 좋은 점은 모르는 사람에게 내 직업을 말할 필요가 없어요. 직업이 있든 없든 상대방과 대화를 시작할 수 있죠. 바르셀로나에서 데이트를 몇 번 해봤는데, 늘 첫 데이트에서 상대방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질문은 '너 뭐 좋아해? 뭐에 관심이 있어? 너 쉬는 시간에 주로 뭐 해?'였어요. 그렇다고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는 건 아닌데 굉장히 늦게 그리고 짧게 나오는 대화 주제예요. 사실 제가 마케터라고 해서 특정 성격이나 취미를 갖는 건 아니잖아요.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직업과 직위는 저 사람이 대충 어느 정도의 물질적 풍요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성 정보로 끝인 것 같아요. 역으로 생각하면 직업을 통해 한 사람이 느끼는 행복은 제한적인 것 같아요.
단디 : 상대의 직업에 큰 관심을 안 보이는 것, 저는 이것부터가 너무 놀랍거든요. 2년 동안 스페인 생활에 적응된 부분도 많겠지만, 그럼에도 해외 생활은 이전까지 나를 둘러싸고 있던 세계를 재인식하는 기회가 될 텐데요. 생활하시면서 스페인 사람들이 삶을 대하는 방식이 수현 님의 방식과 또는 한국의 그것과 너무 달라서 놀랐던 경험이 있을까요?
수현 : 저는 사실 한국인이 슬픔을 깊이 음미할 수 있는 민족이라 생각하거든요? 마치 김치나 막걸리, 장아찌를 숙성시키듯이 말이에요. 상대적으로 스페인은 감정을 숙성시키기보단 휘발시키는 편이에요. 화나고 슬픈 건 잠깐 뿐, 금방 행복 모드가 돼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가끔 들어요. 순간을 사는 방식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요? 스페인은 지금 내게 주어진 것들을 더 만끽하자는 쪽인 것 같아요. 카르페디엠이라는 말로 다 설명되는... 한국과 아주 달라서 놀랐던 경험은 친구 사귀는데 연령, 계층, 성별이 상관없다는 점이에요. 지금 저는 이사벨(69세, 집주인)과 함께 살고 있거든요. 이사벨이 주말에 자기 친구들이랑 같이 점심 먹자고 저를 초대한 적이 있어요. 이것부터가 한국에선 흔치 않은 일이죠. 70대와 30대가 주말에 놀러 나간다? 가족 관계가 아니면 보기 어려운 광경이지 않나요?
단디 : 네. 한국에서는 친지 분의 칠순 잔치나 명절을 제외하고 경험하기 어려운 네트워킹이죠. 완전히 새로운 광경일 것 같아요. 제가 요즘 소셜 살롱이라는 활동을 하는데 거기에서는 나이와 직업이 비공개예요. 서로 나이 상관없이 존중하고 대화하자는 취지인데, 이것 하나만으로도 매력적인 모임이라 시즌마다 모이는 인원 규모가 꽤 커요. 그리고 저는 가끔 카페에 앉아 있다 보면 '그 많다는 노령인구는 다 어디에서 여가를 즐기나'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만큼 한국에서는 연령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선이 강하게 작용하나 봐요.
수현 : 맞아요. 저도 한국이었으면 못해봤을 경험이겠죠. 아무튼,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갔더니 저보다 어린 친구도 있고 30~60대까지 연령별로 골고루 모여 있더라고요. 음악 나오면 같이 어울려서 춤도 추고. 이런 모임이 이 동네에서는 굉장히 흔해요. 얇고 넓은 인적망을 자유자재로 형성하죠.
단디 : 이렇게 스페인에서 잘 지내고 계신 수현 님이지만, 본인이 바로 서기 전까지는 흔들렸던 시기도 있지 않나요? 수현 님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불안감이 있으신가요? 있다면 그걸 다스리는 방법도 궁금해요.
수현 : 막연한 것들에 대한 불안감은 거의 없어요. 저는 구체적인 일들에서 걱정에 가까운 불안감을 주로 느끼는 거 같아요. 예를 들어서 '아 오늘 오징어 볶음이 먹고 싶은데, 오징어가 다 떨어졌으면 어떡하지?', '이 인터뷰 이렇게 재미없게 대답해도 되나?', '남자 친구가 전화를 안 받네. 무슨 일 있나?'. 이걸 다스리는 방법은 빠른 현실 인정 및 대책 강구예요. MBTI 결과에 보면 ENTP들이 그런다고 하는데 정말 그래요. 뭐랄까.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그 어떤 것도 내 본질을 해치지 못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불안할 게 뭐가 있나요.
단디 : 그렇지만 어두운 그림자가 한 조각도 없었어,라고 하기에는 오징어 볶음이 먹고 싶은데 오징어가 없는 구체적인 슬픔도 우리네 삶에 자주 있잖아요. 스스로에게 실망했거나 자신의 심리적인 바닥을 경험했거나, 이유 모를 눈물이 났거나, 흐트러지고 싶었던 때는 없었던 걸까요?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즉, 수현 님이 수현 님 스스로를 흔들었던 이야기 말이에요.
수현 : 그럼요. 당연히 있죠. 저를 흔드는 사람이 한 명 있어요. 바로 엄마에요. 가장 사랑하지만 미울 때도 있는 가장 어려운 대상이죠. 엄마로부터 닮기 싫은 점이 저에게서 보이면 그게 그렇게 겁나더라고요. 최근 김훈 님의 <공터에서>라는 책을 읽었는데 제가 느끼는 종류의 두려움을 다루더라고요.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더라도 유일하게 벗어날 수 없는 혈연의 끈에 대해서 말이에요. 근데 결국은 제가 잘 지낼 수 있는 건 제 주변을 든든히 버텨주는 가족들 덕분이거든요. 물론 한국에 들어가면 일주일만에 싸우고 토라지기를 반복하겠지만, 가족이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죠.
단디 : 맞아요. 부모라는 뿌리가 있어 태어나고 자랐지만, 동시에 그게 그림자 같기도 하고...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면에 형성된 자아를 일부분 수정하면서 나아가야 되는 게 운명이 쥐어준 숙제인가봐요. 살면서 수현 님이 이루고 싶은 행복한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것 또한 수현 님에게는 정해지지 않은 이상향일까요?
수현 : 행복한 삶 보단 자연스러운 삶을 추구해요! 때 되면 알아서 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대신 제가 기준인 거죠. 다른 사람의 때에 맞춰서 움직이고 싶진 않아요. 한 사람이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충분한 준비가 됐는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잖아요. 자신 없으면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 준비하며 기다리는 거죠. 굳이 저를 어딘가에 끼워 맞추려 하지 않아요. 그게 사회문화적 통념이든 뭐든 간에요. 다행스러운 건 천성이 낙관적인지라 허무주의에 잘 안 빠져요. '내가 이걸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어차피 노력해도 결국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일 뿐, 되는대로 살자' 이러지는 않아요. 스스로를 믿고 순간순간 자신이 원하는 바를 두려움 없이 즐기고 싶어요.
에필로그
실내에서 지내다 보면 자연히 이런 저런 냄새가 먼지와 뒤섞이면서 공기가 탁해지곤 한다. 무심코 환기를 잊은 채 잠에 들면 방 안을 메우고 있는 그 묵직한 공기가 답답해서 새벽녘에 잠을 깨기도 한다. 반쯤 눈을 뜬 채로 어슴프레한 빛이 들어오는 창가로 손을 뻗어 창문을 열었다고 상상해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신선한 바깥 공기가 앞다퉈 방 안으로 밀고 들어올 것이다. 나에게는 수현 님과의 대화가 그 신선한 아침공기와 같았다.
모든 일에 이상을 세워 놔야 하나요, 라고 반문하는 문장에는 그녀의 또렷한 눈빛과 확신이 담겨 있다. 그야말로 태양의 도시, 바르셀로나의 지표면을 달구는 강렬한 태양빛 같은 한 마디이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환원되기에 적합한 외면적인 목표를 세우고 살아간다. n살 되기 전까지 n억 모으기, n년차에 n직급으로 승진하기 등. 이러한 목표를 세우고 추구하는 것만이 삶을 안전하게 여행하는 방법이라고 배우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 이상을 세워 놔야 하냐고 묻는 그녀의 질문은 우리가 정해둔 삶의 목표를 '재인식'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낯설게' 만드는 시선이다. 새로운 갤럭시를 보여준 수현 님 덕분에 몸은 한국에 있지만 4차례 서울-바르셀로나 왕복 비행을 하고 돌아온 기분이다.
김영하 저 <여행의 이유>는 2019년 올해의책으로 선정된 산문집이다. 이 책에 나온 몇 구절이 인터뷰를 갈무리하기에 좋은 듯 하여 인용하려고 한다. 2020년 하반기를 앞둔 지금, 모두가 자신만의 여행길에서 조금 더 행복하길 바라며.
우리는 명확한, 외면적인 목표를 가지고 여행을 떠난다. 정해진 일정이 무사히 진행되기를 바라며, 안전하게 귀환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이런 외면적 목표를 모두 달성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설령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 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만약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2020.05.23
녹음이 짙어진 송정동 뚝방길 부근 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