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디처럼. 단순한 소리처럼. 하나의 화음처럼.
본 내용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 내용은 영화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리뷰입니다.
등장인물
양: 중국인으로 설정된 안드로이드. 미카의 오빠 역할을 함으로써 가족들에게 큰 힘이 되어준다.
미카: 제이크와 키라가 입양한 중국 출신 아이. 온 마음으로 의지했던 양을 그리워한다.
제이크: 찻집을 운영한다. 자신의 삶 그리고 가족을 사랑하지만 때로는 무심하다.
키라: 제이크의 아내. 맞벌이로 인해 육아에 전념할 수 없어 고민이 많다.
story
제이크와 키라는 중국 출신 미카를 딸로 입양하였다. 그리고 중국인으로 설정된 안드로이드 양은 미카의 오빠가 된다. 어느 날, 이들은 가족 댄스대회에 출전하였고, 춤을 추던 양은 갑자기 고장이 나버린다. 제이크는 양을 수리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해본다. 양은 새 제품이 아닌 리퍼 제품이었고 그동안 양이 저장해둔 기억들을 꺼내보게 된다. 양의 기억을 통해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게 된 제이크와 키라. 그들에게 시선을 선물해준 양은 앞으로 어떤 존재로 남게 될까.
기억 중 하나, 가족나무
미카는 혼란스럽다. 너의 진짜 부모는 누구냐는 질문들이 미카를 향해 쏟아져 내리고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양은 그런 미카에게 나무를 보여준다. 각기 다른 나무에서 왔지만 하나로 연결된 나무를 보여주며 접목과 연결에 대해 설명해준다. 그리고 말한다.
‘넌 가족나무의 일부야.’
미카가 이 가족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미카의 뿌리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그 한마디로 모두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그 나무의 일부로 충분히 잘 살아가고 있다는 다독임까지도 담았다.
양이 나무를 보여주며 나눈 그 말들은 앞으로 미카가 살아가는 시간에 거대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우린 어떤 현상에 대한 혹은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찾아오곤 한다. 그럴 때마다 양이했던 말을 기억하며, 자신의 가치가 얼마나 높은지 다시 한번 새길 수 있다면 그 어떤 혼란도 물러갈 것이다. 양과 함께 봤던 나무보다도 더 큰 성장을 할 것이다.
기억 중 하나, 차의 맛
양의 또 다른 기억 중 하나는 제이크와 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제이크는 옛날에 봤던 차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양에게 이야기해준다. 다큐멘터리는 차를 찾는 과정을 보여주었고, 흙, 식물, 날씨, 그리고 삶의 방식과 연결하는 과정이지만 그 차를 묘사할 단어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뒤이어 다큐멘터리에서는 차 안에는 비 온 뒤 숲을 걷는 기분이 담겨있다는 묘사를 담았다며 그 묘사가 참 좋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양이 묻는다.
“ 그 말 믿으세요? 차 한 잔에 세상이 들어있다는 말. 장소와 시간을 맛볼 수 있다는 말.”
제이크는 세상이 느껴지는지 마셔보자며 차를 권한다. 제이크는 역시나 묘사할 말이 없다고 했고 양은 자신에게도 차가 그냥 지식이 아니길 바란다고, 차의 깊이를 느껴보고 싶다고 말한다.
차를 찾는 과정은 자신만의 세상을 찾아가는 과정을 닮았다. 비 온 뒤 숲을 상상해보자. 안개가 뒤덮여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또 걷는다. 무엇을 향해 걷는지도 모르는 채. 끝에 도달하고 나서야 비로소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알 수 있다. 차를 찾는 과정 그리고 세상을 찾는 과정은 안개 덮인 길 속에서의 물음표를 느끼는 것이 아닐까.
이 장면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해볼 수 있는 것은 양의 마음이다.
“제게도 차가 그냥 지식이 아니면 좋겠어요. 차에 대한 진짜 기억이 있으면 좋겠어요.”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느끼고 싶었던 양. 그리고 이야기를 멈추고 하려던 말을 까먹었다는 핑계로 자신의 생각을 토로하는 것을 멈춘다. 찻잎을 딸 때 그날의 온도와 습도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AI인 양은 그 기억을 상상하고 음미하는 것에 대해 한계가 있다. 더 깊이 느끼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허함은 양의 눈빛으로 알 수 있다. 양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특별하지 않다. 단지 순간을 깊이 느끼는 것을 원했을 뿐이다. 마치 몸 안에 그어진 선 위에 양의 감정이 제대로 내려가지 못한 채 쌓여만 있듯, 어딘가 체한 느낌으로 지내 왔을지도 모른다.
기억 중 하나, 나비
양은 나비 표본을 수집했다. 이를 지켜본 키라는 나비에 대한 이야기를 양과 나누게 된다. 양은 노자의 말을 알려준다. ‘애벌레에겐 끝이지만 나비에게는 시작이다’. 뒤이어 양은 자신에겐 그 끝에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괜찮다는 말을 전한다. 키라는 묻는다.
-그게 슬픈 적은 없니?
-There’s no something without nothing. (무가 없으면 유도 없으니까요.)
아무것도 없어야만 무언가가 존재한다. 채워져야만 무언가가 탄생할 것 같지만 실은 탄생은 모든 것을 비워낸 뒤에야 이루어진다. 양의 대답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존재, 자신의 기억, 당신의 삶 등. 양이 그동안 이 세상을 살아가고 기억하며 느낀 감정의 한 줄이 아닐까.
가족의 의미
미카는 입양아다. 양은 AI다. 그들은 남편 제이크와 아내 키라와 함께 한 집에 살며 매일 같이 식사를 하고 가족사진을 찍고 가족 댄스 경연대회에 나간다. 서로 사랑하고 배려한다. 혈연으로 이루어진 구성원은 아니지만 그들은 ‘가족’이다. 미카는 학교에서 친구들이 ‘진짜 부모’에 대해 물었고 정체성에 혼란이 왔다. 미카의 혼란은 당연하다. 이 가족이 진짜가 아니라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진짜 가족의 기준이 혈연뿐이라면 그동안 가족이라 불러오던 이들과의 관계가 모두 부정당하는 느낌이다.
속삭이기만 해도 귀 기울여주는 것, 매일 밤 물을 혼자 마시지 않게 곁에 있어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 느끼게 해주는 것. 이것이 양이 보여준 가족의 정의다.
기억의 우주
양의 기억들이 진한 여운으로 남는다. 3초마다 저장되는 기억 속에는 흘러가던 시간, 당연하게 먹던 음식, 사랑, 성장이 담겨있다. 또 어떤 기억엔 소멸, 상실, 슬픔이 담겨있다. 삶에 반드시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양의 기억이다. 양의 기억이 담긴 우주를 닮은 공간에는 기억들이 별이 된 것처럼 빛난다. 모든 순간이 그렇다. 아주 작아 보여도, 누구에게나 있는 순간과 감정인 줄 알지만 사실 나의 우주 안에서 빛나고 있다는 것을 우린 모르고 살아간다. 양의 기억이 가져다준 또 다른 깨달음이다.
제이크의 태도
제이크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인물이지만 이 가정에는 어딘가 모를 불편함이 존재한다. 자신의 감정을 쉽게 공유하지 않고, 가족과의 시간에 정성을 쏟지 않는 모습으로 인해 키라와 미카는 실망한다. 그런 제이크가 변하게 된 것은 양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을 비로소 알게 된 후다. 가족이 아닌 AI로만 대했던 양은 누구보다도 이 가족을 사랑하는 존재였음을, 이 가족에게 있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걷고 뛰고 숨 쉬던 찰나의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미카가 얼마나 멋지게 성장했는지까지.
양이 고장 난 이후, 미카는 내내 오빠가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제이크는 “나도 알아. 네가 보고 싶은 거.” 라며 그를 달래기 위한 답변들 뿐이었다. 하지만 양의 시선을 통해 몰랐던 세상을 알게 된 후 그리고 양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깨달은 후에는 그의 태도가 다르다. 처음으로 미카와 그리움과 슬픔을 나누게 된다. 미카와 나란히 앉아 양을 떠올린다. 그리고 양이 보고 싶다는 미카에게 말한다.
“나도 보고 싶어.”
+) 관련 감독 인터뷰
http://m.cine21.com/news/view/?mag_id=100308
코고나다 감독 : 인생은 끊임없이 지나간다. 그래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관해 탐구할 수밖에 없다. 양이 한 번에 단 3초만 녹화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곧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놓치고 마는 아주 작은 것에 주목한다는 사실이 제이크를 눈뜨게 한다. 나는 제이크가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조용히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는 양을 통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의 아름다움, 딸과 가족에 얽힌 아주 평범한 순간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한 번은 <콜럼버스>의 진(존 조)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는 케이시(헤일리 루 리처드슨)의 눈을 통해 자기 아버지가 가치 있게 생각한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항상 더 크고 바깥의 것, 다른 세상의 것에 흥분하지만 우리가 찾는 것은 정작 우리 옆에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로 앞에 있을 수도 있고. (웃음)
I want to be melody
영화엔 ‘I want to be…’ 뒤의 가사가 내내 나오지 않다가 마지막 장면에 미카가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비로소 완성된 가사를 들려준다. ‘ I want to be just like melody. Just like a simple sound. Like in harmony.’ 양의 오랜 바람이 그 가사로 모두 설명이 된다고 생각한다. 멜로디. 단순한 소리. 화음. 흘러가는 것, 소리 내는 것, 함께 어우러지는 것.
양은 오선지 안에 자신만의 음표를 지니고 하모니를 이루며 살아가기를 원했다. 차의 깊이를 알고 싶은 것도 미카 가족나무의 한 가지가 되고 싶은 것도 한계가 있는 양에게는 그 한계의 벽을 없애고 흘러가길 원했다.
미카의 첫 이별
양이 고장 난 후로 매일 상실의 슬픔을 느끼는 미카에게 에이다가 말한다.
“양은 널 정말 사랑해. 매일 네 이야기를 해.”
미카는 엉엉 울지도 않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숨죽여 눈물을 흘린다. 작은 두 손에 슬픔을 모아 홀로 느낀다. 미카에게 이별은 어렵고 낯설다. 얼마나 슬퍼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랑했던 이가 완전히 떠나갔음을 알았을 때, 그리고 그가 나를 진정 사랑했음을 알았을 때 밀려오는 허무와 그리움을 얼마나 표현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별은 매번 모르는 것투성이다.
첫 이별은 서툴고 어려웠지만 그의 부재를 받아들인 미카는 그가 알려준 중국어로 양에게 마음을 전한다. 미카는 앞으로 양에게 할 말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럴 때마다 두 손에 모아두지 않고 양이 원했던 멜로디처럼 잘 흘려보냈으면 한다. 누구에게나 이별은 오랜 여정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