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택한 최악의 삶에 대하여
본 내용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 내용은 영화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리뷰입니다.
등장인물
등장인물
율리에: 도전에 망설임이 없는 29세 여자. 늘 솔직하고 투명하다. 의학, 심리학 전공을 내려놓고 사진작가의 길을 걷기 위해 서점 직원으로 돈을 벌고 있다.
악셀: 유명 만화가. 한 파티에서 율리에를 만나 연애를 한다. 아이가 있는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지만 율리에와 의견이 달라 늘 다툰다.
에이빈드: 율리에의 새 애인. 지인 하나 없는 파티에 무작정 들어간 율리에를 만나고, 둘은 서로를 그리워하다 본격적인 연애를 하게 된다.
story
STORY
가장 높은 성적이 나왔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의학을 가게 된 율리에는 전공을 바꿔 심리학을 공부하지만 자신이 진짜 원했던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율리에는 사진작가의 길을 새롭게 걸었고, 유명 만화가 악셀을 만나 연애를 시작하지만 가치관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은 자주 부딪히게 된다. 악셀의 세상에 조연역할을 하는 것 같은 율리에는 자신이 주연이 되는 삶을 만들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율리에의 선택
율리에는 많은 선택을 한다. 의학, 심리학, 사진작가. 그리고 진로가 바뀔 때마다 공교롭게 애인도 바뀐다. 율리에의 선택이 충동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녀는 선택한 길에 깊게 충실한다. 율리에의 선택에는 확신만이 존재하진 않았을 것이다. 실패와 후회가 두려웠을 것이고, 열등감도 커져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율리에는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고 곧바로 선택하고 실행한다. 다양한 경험을 주저 없이 쌓아 올린 시간은 율리에에게 반드시 빛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이방인이 된듯한 율리에
부모가 된 악셀의 친구들, 아이를 원하는 악셀, 화려한 그의 출간 파티. 그 세계에 들어와 있는 율리에는 이방인이 된듯한 느낌을 받는다. 파티장을 빠져나와 도시를 바라보는 율리에. 매일같이 보고 걷던 도시이지만 오늘만큼은 그녀에게 낯설게 느껴진다. 율리에는 채워지지 않는 성취감, 만족감이 그날의 공허함으로 가져와졌다. 그래서 율리에가 도시를 바라보는 눈빛은 익숙함이 아닌 낯섦이다. 매일 살고 있는 곳이지만, 이곳에서 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 여겨질 때가 있다. 그럴 땐 율리에의 눈빛이 내 눈앞에 아른거릴 것 같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율리에의 가족
율리에의 부모님은 일찍 이혼했다. 율리에의 엄마는 그녀의 선택이 무엇이든 더는 묻지 않고 존중해 준다. 그녀의 재능을 칭찬하고 아껴준다. 하지만 아빠는 그렇지 않다. 율리에의 아빠는 새 가정을 꾸렸고, 그녀에겐 관심이 없다. 율리에의 생일파티에도 허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오지 않았다. 결국 율리에는 아빠의 집으로 직접 찾아간다. 축하와 사랑을 받기 위해. 그는 율리에에게 생일선물을 준다. 선물은 율리에가 평소에 입지 않는 운동복 그리고 집에 들어온 그의 또 다른 딸은 같은 옷을 입고 있다. 율리에가 보내준 글도 읽지 않았다. 읽을 마음도 보이지 않는다. 율리에는 그런 아빠에게 한 번도 분노를 표하지 않는다. 이해한다며, 괜찮다며 애써 웃음을 짓는다.
율리에가 아빠에게 서운함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는 것은 영원히 아빠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율리에만이 잡고 있는 관계의 끈을 놓는 순간 영영 모든 것이 사라질까 봐 무서워서. 율리에는 아빠에게서 오는 사랑의 부재를 알기에 홀로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외로움이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 후, 오랜만에 만난 악셀이 그녀에게 아빠의 안부를 묻자, 연락을 끊었다고 했다. 악셀의 이별을 통해 그녀는 이겨내고 싶었던 외로움을 하나씩 깨부수는 중이었다.
악셀의 작품 영화화
악셀과 친구들은 자신의 작품이 영화화되는 이야기를 나눈다. 악셀은 영화 제작에 대한 불평을 토로하며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내 작품이 아니야. 너무 건전하고 안전한 느낌이야.” 평소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율리에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대화를 듣기만 한다. 악셀의 작품 속 캐릭터가 본인의 상황과 비슷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프롤로그, 열두 개의 챕터 그리고 에필로그
악셀과의 연애를 시작으로 악셀의 친구들을 만나는 것으로 챕터가 시작된다.
열두 개의 챕터에는 방황과 좌절이 대부분이다. ‘나’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매 챕터마다 화려할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 넘어지고 반복하며 걷는 것이 이야기를 채운다. 주인공의 삶을 살아갈 때도 누구나 최악이 된다.
율리에의 용기
“혼자가 되는 게 두렵다고 말했다. 그 없이 사는 게 두려웠다. 그를 떠난 그녀는 얼음 위의 밤비처럼 될 거다. 하지만 그게 바로 떠나야 하는 이유였다.”
율리에의 결점 중 하나는 혼자 있기 두려워하는 것이다. 율리에는 말과 행동으로는 자신만의 세상을 지켜나가기 위해 행하지만, 사실 마음 한편엔 악셀의 부재가 두려웠고, 악셀의 그림자가 편안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그녀의 공허함이 해결되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독립적으로 살아갈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또한 율리에가 악셀에게 이별을 고한 것은 단순히 에이빈드를 향한 마음만이 아닌, 홀로 서고 싶다는 외침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율리에가 자신만의 성장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은 악셀과 사랑하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애는 내가 몰랐던 상대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몰랐던 나의 모습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누구에게나 최악의 면모가 있고, 율리에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그 면모를 마주하고 극복해 나가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 걸음이 서툴수록 더 마음이 간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니까.
그들의 감정에 몰입하게 만들어주는 연출
1) 율리에와 에이빈드의 담배연기씬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바람을 피우는 기준에 대해 이야기하며 절제와 이끌림의 사이를 배회한다. 율리에가 피우는 담배연기를 에어빈드가 빨아드리는 장면은 바람을 피우지 않기 위한 절제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충동의 사이에 있는 둘의 감정을 잘 드러낸다. 직접적인 키스는 아니지만 둘은 서로에게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피어나는 담배연기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2) 시간이 멈춘 채로 에이빈드와 시간을 보내는 율리에
율리에는 악셀에게 이별을 고하기 직전, 잠시 깊은 상상을 한다. 세상은 모두 멈췄고 에이빈드와 율리에만이 움직이고 있다. 율리에는 에이빈드에게 달려가고, 둘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여전히 시간은 멈춰있다.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흘러가지 않은 채. 그리고 율리에는 자유롭게 웃고 있다. 둘의 사랑뿐만 아니라 율리에는 변화의 순간마다 이런 바람이 있었을지 모른다.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흘러가지 않은 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 보는 것을 늘 작게 꿈꿔왔을 것이다.
방을 전전하는 이야기
이동진 평론가는 이 영화를 ‘방을 전전하는 이야기’라 표현했다. 영화에선 율리에의 방이 나오지 않는다. 엄마의 집, 악셀의 집, 아빠의 집에서 모든 이야기가 펼쳐지다가 마지막 장면에 자신만의 방이 비로소 나온다. 그리고 자기만의 방을 찾아가는 사람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핵심이라 말한다. 카렐 차페크의 <정원가의 열두달>이라는 책에서도 비슷한 문장이 있다. ‘누구나 자기만의 정원이 있어야 한다.’
나만의 방, 나만의 정원, 나만의 세상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크기, 모양, 색깔은 단번에 떠오르지 않는다. 계속해서 걷다 보니, 또 계속해서 잃다 보니 자연스레 나만의 세상이 만들어져 있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지만, 그 모습이 만들어낸 나만의 세상은 누구나 빛난다.
참고 칼럼
“대부분의 일은 인생에서 대체로 무의미하다. 사랑, 직업 혹은 아이나 결혼처럼 큰 의미를 둘 수밖에 없는 일을 만나게 되고, 그 모든 걸 잃을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그런 걸 느끼고 경험해도 된다는 걸 배웠다.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해도 스스로가 먼저 세상 최악의 인간이 된다면 그것으로 괜찮다.” 레나테 레인스베의 말처럼 온전한 자신이 되고자 한다면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온전히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이란 타인에게 마냥 좋은 사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