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irector JI May 25. 2024

#6 타협

20240525

어제 오후부터 콧물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밤에 몸살기운이 올랐다.

오늘 하루종일 육아를 해야 해서 본가에 넘어가 부모님께 잠깐 아이를 맡기고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하루종일 머리가 지끈거리고 이가 빠질듯한 통증이 이어졌다.


밤이 되어 집에 돌아와 씻고 자려다가 오늘은 당연히 컨디션이 안 좋으니 글을 넘겨야지 생각하다가 문득 장인들을 떠올렸다. 장인들의 모습을 동경하지만 나는 또 익숙한 관성에 그대로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뭐라도 남겨야지 하는 생각으로 노트북을 열었다. 지금 반영되지 않는 깨달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부터 바뀌어야 남들에게 이야기할 자격이라도 되지..


문득 나에게 "자존감은 나와의 약속을 잘 지켜야 올라가는 것 같아"라고 말한 친한 누나의 말이 떠올랐다. 나 혼자 타협하고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적어도 나는 안다.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몇 해전 불상을 만드는 목조각장 전기만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다. 아흔이 훌쩍 넘은 선생님을 우리 영상에 담고 싶어서 만나 뵙기로 했고, 우리만 가면 절대 허락 안되다며 종 선생님이 직접 동행해 주셨다. 그렇게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선생님 댁에 도착하고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아주 큰 고목이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선생님들과는 다르게 소박한 작업장이 딸린 작은 집 한 채. 마당에 자리한 큰 나무들이 있었다. 나무의 수분을 몇 해 동안 빼야 불상을 만들 수 있어서 마당에서 건조작업 중인 나무였다. 선생님 댁으로 들어가 종 선생님과 두 분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먼지하나 쌓여있지 않은 방, 털하나 떨어져 있지 않는 화장실을 보며 아흔 넘어 혼자 사는 할아버지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근처에 사는 제자들이 식사를 차려준다고 해도 마다하고 혼자 아무런 흔적들을 남기지 않고 살고 계셨다. 선생님들끼리 짧은 이야기를 나누시고 몇 분 되지 않아 전기만 선생님은 작업장으로 나갔다. 귀가 잘 안들리시기도 했지만, 오히려 귀를 닫았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말씀을 아끼시고 바로 작업에 들어가셨다. 톱밥이 쌓인 작업실에서 수십 년을 했던 그 작업을 처음 하는듯하게 끌과 정을 들고 살 한 점을 툭 덜어내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다시 살 몇 점 몇 점을 덜어냈다. 종 선생님이 옆에 있어도 있는 듯 모르는 듯 순간 불상과 장인 혼자만 남아있는 듯하게 무엇을 물어보지도 더 이상 설득을 하기도 어려운 모양으로 작업만 하고 계셨다. 얼마나 덜어내고 비워내야 내가 할 일이 오직 이것뿐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종 선생님이 웃으며 이 선생님을 찍어야 한다고 했을 때 가늠은 할 수 없지만 진짜 장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에 제자도 많으시고, 국가무형문화재도 본인이 신청하지 않았는데 주변의 권유로 되었다는 알 수 없는 후문도 들었다. 시선을 안으로 가둔다는 것이 차분히 내려앉은 공기처럼 무거웠다.

아직 나는 많은 것들을 체크리스트에 두고 여러 개의 고려사항들을 살펴본다. 할 수 없었던 이유와 되지 못했던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한다. 타협인가 아닌가는 본인이 가장 잘 안다. 자각하면서 살지 않으면 핑계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갈 수도 있겠다.



작가의 이전글 #5 뿌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