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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ter Cha Apr 23. 2023

나의 영역.

The realm of mine.

나는 '어쩌다 어른'


이라는 프로그램을 참 좋아한다. 한 번은 심리학자인 김경일 교수님의 강연에서 '와, 이거구나'하는 개념을 배웠다. 바로 '내 영역'이라는 것.


 강연에서 교수님은 '우리는 누구에게 가장 많은 화를 낼까?'라는 질문을 하셨다. 보통 엄마나 배우자같이, 나와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이 사람은 내 사람이기 때문에, 내 영역에 있는 사람이다'는 생각이 있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이 사람은 내 것이라 착각을 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로 이 사람이 행동하지 않으면, 남이라면 화가 나기는커녕 신경도 쓰지 않았을 행동에도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날 수 있다고 설명하셨다.


너무 이해가 되는 것과 동시에,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합리화해서는 안 되겠다는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좋은 강연이었다. 방송에서 많은 방청객들이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나는 교수님이 들었던 예시의 반대 방향에서 이 강연이 또 한 번 와닿았다. '그 방식은 다르지만, 같은 패러다임이구나.' 하는 깨달음.



'너도 그래야지'


라는 생각을 나는 참 당연하게 하고 있었다. 바로 내 아내에게 말이다. 나는 결혼 후 이 잘못을 아내에게 참 많이 했는데, 바로 '내가 괜찮으니까 너도 당연히 괜찮은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내 영역 안에 아내라는 사람을 넣고, 내 생각을 강요하는 말과 행동을 했으니, 안 싸우는 것이 어쩌면 더 신기한 일이었겠다.  


 나에게 익숙한 시댁의 분위기와 시부모님의 말과 행동은, 30년 동안 다른 세상에서 자란 아내에게 당연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에이 뭘 그렇게까지 기분 나쁘게 생각하느냐.' 또는, '아니 이렇게까지 부정적으로 해석할 일인가?'와 같은 멘트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부끄럽고 화려한(?) 멘트들로 아내와의 전쟁을 촉발하곤 했다. 그 수많은 잘못들이 강의를 다 들었을 무렵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 의미로, '사랑하는 상대방을 더 존중한다는 것'은 단순히 상대방에게 쉽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랑하니까 내 영역에 함부로 넣지 않는 것'. 그곳에서 출발해야 되는 것이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내 영역은 오롯이 나만의 것일 뿐임을 인정할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생각을 만나고 나니, 나는 나 스스로를 단순히 내가 아내보다 화나 짜증을 덜 낸다고 해서 내가 아내보다 더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던. 그 얄팍한 교만과 착각에 참 오랫동안 빠져있었음을 알게 됐다. 더 좋은 사람인 척했지만, 오히려 더 조용하게. 아니, 더 음침하게 상대방을 내 영역에 넣고 내 생각을 강요했다고 인정하게 된다.



Miscommunication의 비극


그렇기에 나는 내 영역에서 당연한 것을 나도 모르게 상대방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더더욱 예민하게 점검하고 살펴야 한다. 내가 부정적인 감정을 꺼낼 때도, 상대방이 꺼낸 감정을 들을 때도. 쉽진 않겠지만 항상 점검해야 한다. 이 점검을 잘 못하게 되면, 아래 세 가지 실수를 쉽게 하는 것 같다.

 

1. 상대방이 내 영역 안에 있지 않음에 분노한다.

2. 내 영역의 당연한 법칙이 상대방에게 어떤 낯섦과 당혹감으로 들릴지에 관심이 없다.

3. 확실한 논리로 상대방을 제압하면, 상대방이 내 영역에 들어올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면, 이 세 가지 실수는 아래 세 가지 비극을 가져온다.


1. 실제 상대방이 잘못한 크기보다 상대방의 잘못을 더 크게, 더 괘씸하게 여긴다.

2. 상대방도 내가 너무 낯설거나 당혹할만한 자기 영역의 논리를 막무가내로 꺼내기 시작한다.

3. 어느 한쪽이 사과한다 해도, 진심이 담긴 사과가 아닌 마지못해 하는 사과를 할 뿐이다.


이런 실수와 비극을 반복하면 할수록, '대화가 안 통한다'라는 결론으로 많은 부부들이 이혼이라는 결말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대화라는 공간을 선택하다.


 내 영역은 오롯이 나의 것인지. 내가 상대방을 내 영역 안에 맘대로 넣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잘 점검할 수 있다면, 분명 나는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더 차분히 설명할 수도 있고, 상대방의 감정에 더 차분히 공감하고 이해하려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잘 생각해 보면, 상대방이 내 영역을 충분히 이해하고 적응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과 설명이 불가피하다. 반대로 내가 상대방의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설명을 요청하고, 그 설명을 듣는 경청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 또한 그렇다. 그래서 항상 '좋은 대화'가 필요하다. 내가 느끼는 자극에 대해 화를 내고 분노하는 것은 그 대화를 가진 후에 해도 늦지 않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이자, 독일 나치에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은 유태인 중 한 명인 빅터 프랭클은 아래와 같은 아주 유명한 말을 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자신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성장과 자유는 그 반응에 달려있다."

- Viktor Frankl

자극에 바로 반응을 했던 나. 즉, 내 영역을 아내에게 강요했던 나는 '어떻게 그렇게까지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 있느냐'라는 반응을 주로 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내 영역은 오롯이 나에게만 해당될 수 있음을 알고, 아내의 마음이 어떻게 상하게 됐는지, 그 자극과 반응 사이에 대화라는 공간을 만들기로 선택해본다.




사실, 빅터 프랭클의 저 명언은 워낙 오래됐기도 했고,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요즘에 이르러서야 나의 영역을 조금이나마 분별하고 대화라는 선택을 했고, 그렇게 내가 실제로 좀 더 성장하고 자유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참.. 그동안 나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 거리가 그래도 조금은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다 어른이 되어갈 뿐이었던 나는 이제야 저 말의 진정한 의미를 조금 더 알게 된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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