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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ter Cha Aug 13. 2023

기억의 동물

여측이심(如厠二心)을 이기는 기억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라는 것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의한다. 그 절대적인 시간이 길든 짧든, 시간이 흐르며 불편함이 줄어드는 것. 바로 적응의 힘을 모두 겪어봤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라는 문장에도 대부분 쉽게 고개를 끄덕인다. ‘망각’이라는 요소는 인간의 방어기제 중 하나로 발현될 정도로 우리 삶에서 필수적이기 때문이리라. 기억하기 싫은 괴로운 기억들이 잘 잊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저주가 틀림없다.


하지만, 역시 뭐든지 장단점이 있는 법일까. 적응과 망각에게는 양날의 칼처럼 존재하는 개념이 있으니, 바로 불평, 불만, 그리고 간사함이 그 주인공 되시겠다.




 사람은 적응과 망각의 동물로만 남아서는 곤란하다. 적응과 망각의 좋은 점도 분명하지만, 이전의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리고 이전을 생각하면 지금의 삶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등을 잊기 때문이다.


 한 번은 이직을 한 뒤, 지금 생각해도 아주 파격적인 기간을 보낸 적이 있다. 경력직으로 입사를 했기 때문에 기본적인 직원교육이 마치면 바로 프로젝트에 투입되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나의 예상과 다르게, ‘한 달 동안은 회사에 적응도 할 겸 아무 일도 시키지 않을테니, 지금 팀에서 쓰는 프로그램들 중 이전에 써보지 않았던 것이 있다면 공부도 하시고 맘 편히 적응하는 기간을 가지세요.’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 못했던 너무 놀라운, 또 너무 멋진 배려였다. 전 직장 퇴사 후 입사 전 기간이 짧았던 터라 충분히 쉬지 못해 아쉬웠던 마음이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게다가 전 직장에서는 내가 공부하고 사용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회사에서 사용한다는 게 꿈같은 것들이었는데, 이곳은 대놓고 공부를 하는 기간을 가지라고 하다니! 보통 공부가 필요하면 퇴근 후 자신의 시간을 할애해서 따로 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야말로 감동, 또 감동.. 원래 입사한 직후가 애사심이 가장 높을 때이긴 하지만, 정말 극단적으로 애사심이 올라갔던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감사한 기간을 한 달을 보낸 뒤, 이제 본격적인 밥 값(?)을 할 때가 다가왔다. 하지만 그 한 달 동안 너무 적응을 해버렸을까. 투입되게 되는 프로젝트로 인해 회의에 들어가거나 타 부서의 협조를 위한 문서 작업과 같이, 내가 하고 싶은 개발과 관련이 없는 일을 잠시 하게 될 때면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곤 했다.  

"아.. 나 이 공부 좀 더 해야 하는데, 자꾸 공부 못하게 방해하네?"

 참.. 웃기는 생각이지 않은가! 회사가 나에게 허락해 줬던 고마운 기간은 어느새 당연한 것이 되었고, 심지어 나의 권리라는 생각까지 생겼던 것이다. 전 직장에서는 합리적인 보상 없이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을 했었는지 모두 잊었다.

 업무강도나 처우만 생각해 봐도 전 직장과 비교되는 것이 너무 많은데. 자기계발은 커녕, 회사가 해라고 하는 일만 하다가 어쩌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는 날이면 너무 좋아했었는데 말이다. 그랬던 지난날들은 기억도 하지 못한 채, 마치 내가 가지고 있는 특권을 당연하게 여기는. 마치 그 특권이 침해당한 것 같다는 이상한 논리가 내 안에서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런 상황에 딱 맞는 한자 사자성어로 ‘여측이심(如厠二心)’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직역하면 ‘화장실의 두 마음’. 우리가 흔히들 쓰는 '화장실 갈 때와 올 때 마음이 다르다'라는 표현이다. 재밌는 것은 영어 표현 중에서도 ‘Danger Past, God forgotten’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말 그대로 자신이 절박하고 위급할 때는 간절히 신을 찾다가도, ‘위험이 지나고 나면 신은 잊히고 만다’라는 표현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런 태도는 예로부터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못난 모습이었나 보다.


우리는 종종 이런 태도를 '간사하다'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 간사함의 이면에는 적응과 망각으로 인해 사라져 버린 감사함이 있을테다. 그래서 인간은 적응과 망각의 동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기억의 동물'이어야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어떠한 상황에 있던 사람인지. 그래서 내가 그 상황을 벗어났을 때, 얼마나 감사했었는지 등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감사를 기억하지 못하고 망각한다면, 자신이 누리고 있는 감사의 조건들을 어느새 '당연한 것'으로 치부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 부모님은 내 어릴 적 모습이 담긴 20, 30년 정도 지난 사진들을 종종 보여주시곤 한다. 부모님은 '이때 참 귀여웠는데'하고 짧은 감상을 남기시기도 하지만, '이때 김해에서 참 쉽지 않았지..' 하시면서 잠시 추억에 젖기도 하신다. 그런 부모님을 볼 때면, '참 앨범이라는 것이 단순히 사진만 보관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그 시절의 어려움을 기억하고, 또 지금의 행복을 '감사함'이라는 감정으로 변환해 주는 변환기. 그 시절에도 이런 웃을 수 있는 순간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감사하게 해주는 타임머신. 앨범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의 기억을 도와주는 엄청난 물건이지 않을까. 더욱이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사실 당연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게 해주는 좋은 헬퍼(Helper)이기도 하다.


 앨범이 아니더라도, 어느 날 내가 적었던 일기장이나 한 번씩 정리해 보는 이력서, 혹은 내가 스스로 반추해 보는 나와의 시간 등으로 얼마든지 우리는 내가 어떠한 상황들을 겪어왔는지 쉽게 기억해 볼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망각과 적응에게 속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감사를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찾은 감사는 나를 좀 더 기억의 동물로 만들어 줄 것이고.







Reference

-【박성태 칼럼】역시 그들은 ‘여측이심(如厠二心)’의 대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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