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카미 미에코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하루키와의 롱 인터뷰집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에서였다. 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는 하루키가, 그것도 단행본 분량으로 그녀를 ‘지목’해 대화를 나누었다는 건, 그녀가 일본 문학의 차세대로서 얼마나 주목받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가와카미는 이후 한강이 받았던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는 등, 꾸준하고도 인상적인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헤븐』은 내가 처음 읽은 그녀의 작품이었다. 밀리의 서재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이것부터 읽어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펼쳤다. 그리고 곧, 나쁘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에 읽은 김애란의 『이중 하나는』처럼, 어린 독자들에게도 권하고 싶은 작품이었다. 물론 소재가 학교 폭력인 만큼 폭력적인 장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자극적이거나 불쾌감을 주는 수준은 아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독자를 소설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이었다. ‘이제부터 소설의 세계로 들어가야지’라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 없다. 문장은 매끄러운 빙판 위처럼 반들반들하고, 독자는 그 위에서 저절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이 작품은 어리고 미숙한 성장기 커플의 순수하면서도 때로는 야성적인 관계를 그린다는 점에서, 내가 ‘폭풍의 언덕’류로 분류하는 소설들과 결이 닿아 있다. 하지만 그 핵심 메시지를 곱씹어보면, 더 닮은 건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다. 바틀비는 적극적인 저항이나 폭력을 택하지 않는다. 그저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선언만으로, 쓰레기처럼 쏟아지는 폭력과 부조리 속을 묵묵히 견뎌낸다.
『헤븐』 속 고지마의 말도 그렇다. 그것은 단순히 힘이 없어 참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과 ‘연대하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의미를 갖는다는 이야기다. 가와카미는 이 과정을 질질 끌지도, 성급하게 몰아붙이지도 않는다. 적당하고 완벽한 속도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다만, 바로 그 지점에서 불만도 생긴다. 이 소설은 군더더기가 없다. 너무 없다. 매끈매끈한 알루미늄처럼 표면이 매력적이지만, 끝내 거친 단면이나 상처가 드러나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시종일관 맞기만 하고, 빌런 캐릭터들도 큰 활약을 하지 못한다. 마치 모든 것이 의도적으로 절제된 세계에서, 독자는 마지막 장을 덮으며 ‘조금 더 거친 숨소리’를 원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븐』은 분명 견디는 것의 의미를 다시 묻는 소설이다. 그것은 약함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우리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자, 소리 없는 저항의 또 다른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