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라질 수 없는 존엄 — 한승태, 『어떤 동사의 멸종』

by 박둥둥

한국에 다녀오면서 책을 잔뜩 들고 돌아왔다. 전자책으로는 만나기 어려운, 종이로만 만날 수 있는 책들을 골라 담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집어 든 것은 미국의 수백 명 노동자를 인터뷰한 기록집, 스터즈 터클의 『일』이었다. 책장을 넘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의 노동 이야기를 다룬 책이 궁금해졌다. 그렇게 발견한 것이 한승태의 노동 에세이 『어떤 동사의 멸종』이다.


한승태는 단순히 책상 위에서 노동을 말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는 양돈장, 콜센터, 택배기사 등,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들고 험한 일터로 직접 들어가 무명의 노동자로 살아본다. 그리고 그 속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글로 남긴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적당히 진지하고, 알맞게 찰지다’는 것이었다.


요즘 직업 체험은 이미 유튜브에서 흔하게 소비되는 콘텐츠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가볍고 오락적이며, 현실과는 멀다. 유명인이 하루쯤 체험하는 ‘소꿉놀이’식의 직업 체험—호텔 고객에게 “왜 이렇게 비싼 방에 묵으세요?” 하고 묻는 식의, 실제 현장에서는 불가능한 장면들—이 삽입되곤 한다. 그 안에서 직업의 본질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말해야 할 무언가는 웃음과 해프닝 속에 묻혀버린다. 나는 그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승태의 에세이는 다르다. 하루만 보고 나오는 관람객이 아니라, 그곳의 한 사람으로 땀과 시간을 같이 보낸다. 동료와 함께 노동의 무게를 견디고, 그 속에서 좋은 점과 어두운 점을 모두 꺼내놓는다. 그리고 다가오는 AI 시대에 이 일마저 곧 사라질 수 있다는 쓸쓸함까지 숨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글이 무겁고 답답하게만 흐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필력 좋은 인터넷 글처럼 유머와 풍자가 적재적소에 배어 있다. 마치 입으로 전해지는 구비문학처럼, 한 장 한 장이 굽이굽이 이어진다. 그러다 문득, 현실 속 노동의 냄새와 소리가 불쑥 다가온다.


2024년이 이제 2주 남짓 남은 이 시점에서, 나는 이 책이 올해의 책으로 남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단지 ‘좋았다’는 감상으로는 부족하다. 내 돈으로 사서 주변에 꼭 보여주고 싶은 책, “나는 독서와 안 맞는다” 자조하는 이에게 건네고 싶은 책이다.


100점 만점이라면, 나는 주저 없이 천 점이라도 주고 싶다.
왜냐하면 이 책은, 우리가 잊고 살았던 ‘사라질 수 없는 존엄’을 다시 꺼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keyword
이전 08화뜬구름 대신 몽당연필을 쥐어주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