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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할무니 Feb 23. 2020

전날 과음하길 정말 잘했어요.

탕상수첩 스무 번째 기록, ‘중화루’

어떤 도시가 그 도시를 대표하는 특색을 가진다는 건 동네 주민으로선 반가운 일이다. 어디 가서 동네 소개하기도 편하고, 뭔가 든든한 느낌이랄까. '우리 동네 이 정도야' 같이 자신감을 더해주기도 하고. 사람들이 많이 아는 도시에 살고 있다는 일종의 성취감이랄까. 


목포는 항구다. 정확히는 항구도시지만. 근데 생각보다 '목포=항구'의 색채를 느끼기가 쉽지 않다. 뭐, 사람 사는 곳이 이제는 다 거기서 거기인 모양새이니. 여하튼 기대만큼의 목포는 아니었다. 그래도 '전라도 음식은 어딜 가든 맛있다'라는 불변의 진리 같은 게 또 있지 않은가. 어딜 가도 실패는 안 하는 전라도에서, 그것도 전라남도를 대표하는 대도시 목포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지는 못하지만 탕수육을 외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목포 시민들에겐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럼, 이제는 '목포는 항구다' 같은 고정관념에서 그만 탈피하자. 우리 모두 '목포는 중화루다'라는 인식을 새로 새길 필요가 있다. 싫으면? 할 수 없다.



중깐 탕수육. 누가 보면 중간 탕수육만 파는 줄 알겄소.


빨강과 노랑은 사람의 눈에 가장 잘 띄는 색일 뿐만 아니라 식욕을 자극하는 색이라고도 한다. 1947년부터 영업을 해왔다고 해서 당연히 금방이라도 무너질 만한 곳을 떠올렸는데, 이렇게 시각 세포의 특성을 간파한 간판 색 조합을 보고 있자니, 나도 참, 한 치 앞도 못 보는 나쁜 버릇을 이제는 고칠 때가 되었다. 이 얘기만 십수 년째기는 하지만.



양파, 단무지, 춘장, 김치 4종 세트. 중국집 김치는 괜스레 반갑다.


중국집 김치는 중국산 김치일까 국산 김치일까. 배추는 국산, 고춧가루는 중국산이면 그 김치는 중국산 김치일까 국산 김치일까. 생각해보니 문득 궁금해지기는 하네. 하긴, 음식 국적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사람 국적도 중요하지가 않거늘. 맛만 있으면 그만인 것. 내가 괜한 말을 했구먼.



고기튀김과 소스의 분리 배급은 이 집만의 비급?
색감만큼은 간판에 못 미치지만 맛은?


폭신폭신한 탕수육. 소스를 끼얹으니 그 폭신함이 배가 된다. 맛도 배가 되면 좋으련만. 근데 뭐, 탕수육은 아무리 못해도 어느 정도의 맛은 보장하니, 큰 기대만 안 한다면 나쁘지 않은 수준이다. 간판만큼의 특색이 없을 뿐이지 맛없는 탕수육이란 소리는 아니니까. 근데 모나지 않은 맛이 장수의 비결일 수도 있겠다. 누구에게만 어울리는 맛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맛. 헛, 생각해보니 그게 더 어렵겠구나. 짧고 굵게 가느냐, 얇고 길게 가느냐. 이런 고민도 경지에 오른 고수들이나 할 수 있는 거다. 그다음부터는 취향의 문제가 되는 거고. 열심히 떠들기는 했지만, 그냥 내 취향은 아닌 거로 하련다.



계란 후라이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계란 후라이를 품은 간짜장이다. 정말이다.


수분감이 폭발했던 면발과 간짜장. 어떤 작업을 따로 거친 건지, 아니면 면을 삶고 물기를 탁탁 털어내지 않은 건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비비면서든 먹으면서든 굉장한 수분감이 느껴진다. 간짜장까지 먹고 나니 확실히 감이 오는 게, 요리에서 전반적으로 염분기가 많이 느껴지지 않는다. 뭉실뭉실한 맛이라고나 할까. 부드럽고 자극적이지 않아 누가 먹어도 같은 맛으로 느껴지게 하는 형평성이 있다. 공정한 평등의 맛. 판사 선생님들이 한 번씩 잡숴봤으면 하는 맛이다.



전날 과음하기를 잘했다.


목포 여행의 마지막을 짬뽕으로 장식한 건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탕수육과 간짜장에서 발견한 맛의 특징이 짬뽕에도 여실히 적용되니, 유레카, 내 발견이 헛수고는 아니었구나. 두텁고 얼얼한 국물이 아니길 바랐다. 발견에도, 바람에도 부합하니 이리도 좋지 아니한가. 전날 과음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불쑥 들면서, "금주는 안 되겠지만 절주라도 해야지"라는 내 또 다른 바람은 찢긴 종잇장처럼 없어져 버렸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지. 등가교환.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이다.


근데, '목포는 항구다' 포기하고 '목포는 중화루다' 얻는 게 등가교환이 맞나 싶네.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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