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상수첩 열아홉 번째 기록, ‘대가향’
대학교 동창들과 오랜만에 만났다. 사실 동창이라는 말로 뭉뚱그리기에는 너무 딱딱한 감이 없지 않은 사이인데, 쓰라고 만들어놓은 단어니까 친분의 깊이와는 상관없이 한번 써보기로 한다.
오랜만에 만나니 안 보니만 못하게 어색한 사이가 있고, 오랜만에 만나도 마치 어제 본 것처럼 편한 사이가 있다. 나만 느끼는 걸 수도 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대학 동창들은 언제 어디서 만나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물론 이 모든 건 내 덕이 아니라 그들의 덕이다.
여하튼 시간 장소 불문하고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고, 함께하고 싶을 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이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고 늘 생각하지만, 가끔은 사람이 그리울 때가 있는 법이니까.
그래서,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인 만큼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특별한 게 필요하다면 으레 이곳을 찾게 되는 것이다.
"대가의 향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용불용설이랄까. 개그도 치던 사람이 쳐야지, 안 쓰다 짜내려니 더 생각나는 것도 없고, 점점 능력을 상실하는 기분이다. 없는 능력을 짜내려니 뇌가 그리 쭈글쭈글한 건가. 쭈그리 신세 면하기가 참 쉽지가 않네. 뭐, 그래서인지 그다지 통제력이 강한 편도 아니라서, 손가락 가는 대로 쓰다 보니 결국 이 모양 이 꼴이다. 상투적인 게 괜히 상투적인 것이 아닌가 보다. 벗어나기가 참.
지역색이라고도 하는데, 흔히 '~~도'를 기준으로 개인의 성향을 나누기도 하고 맛이나 복색의 차이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이건 강남 3구 탕수육의 지역색이 아닐까. 튀김과 고기 사이의 유착이 실로 밀접하지가 않아서 베어 물어 치아가 고기에 닿는 순간까지의 찰나가 거의 정신과 시간의 방 수준이다.
저질의 고기로는 저런 시도도 힘들다. 자신감의 발로라고 봐야지 뭐. 튀김옷에서 이미 강한 인상을 받았으니 시작이 좋다. 시작이 반이니까 반은 먹고 들어간 거다. 실제로 탕수육의 반이 튀김이기도 하다.
멕시코씨티에 있는 한인 중식당에서 산체스가 먹을 법한 깐풍기다. 깐풍기에 사람 당황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바다 건너서도 나초는 큰일을 해내는구나. 치즈 소스 없이 먹어도 맛있는 게 새삼 새롭네. 나초, 다시 봤다.
물론, 국적 불문하고 깐풍기는 언제나 맛있으니까. '당황=흥분' 공식으로 맛에 긍정적인 작용을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이게 뭐가 어렵다고 그래" 하면서 만드는 데 성공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전설의 요리 멘보샤. 황금빛 넘실대는 가을걷이 현장이 바로 이런 거 아닐까. 잘 익은 벼 수확하는 기분으로 멘보샤 한 점 집어 들고 나면 세상 부러울 거 하나 없는 나는야 골든 제임스 브라운 I feel good.
우리 집 뒤에는 본래 산이 있었다. 오래 전 그곳은 터널이 되었고, 산을 집으로 살던 잠자리들은 다른 터전을 찾아 모두 떠나야만 했다. 오랜만에, 이곳에서 그때 그 잠자리를 만났다. 비록 앞섬을 풀어헤친 자태지만, 그래도 괜찮다. 오랜만이니까. 오랜만인데도 반가운 걸 보니 잠자리도 어색한 사이는 아니었네.
동창인데, 오랜만에 본다면 안 보니만 못할 만한 그런 동창이 있다. 별명이 쟁반짜장이던 동창. 지금 이 쟁반짜장을 보고 있자니 그 사람, 그때 참 힘들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쟁반짜장이었던 그 사람은 그때 어떤 기분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