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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다

비와 음식 사이

by 포포

장마철이 왔다. 날마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처럼 어김없다.

장마철에 막걸리와 전이 잘 팔리는 것도 어김없는 사실이다. 모기, 곰팡이, 식중독 환자 들의 증가도 어김없이 일어난다. 채소와 과일 가격은 올라가고(유통기간이 짧아지고 당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육류와 달걀, 유제품 가격은 안정되는 것(구제역, AI 등의 질병이 주춤해지기 때문이다)도 어김없다. 장마철에는 가끔 삼겹살보다 상춧값이 비싸지기도 한다.


장마는 한국과 일본, 중국 일부에 한정돼 일어나는 동아시아 고유의 기후 현상이다. 동남아와 아프리카, 중남미에서 일어나는 ‘우기(雨期, monsoon season)’와는 다른 기후다. ‘비’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내리는 형태도 다르고 받아들이는 인간들의 태도도 다르다.


한국의 장마철은 대체로 불안과 침잠으로 인식된다. 심신이 축축 처지는 시기다. 남쪽 지역의 우기는 생산과 순환의 활력기로 인식된다. 태국, 베트남, 필리핀 같은 곳에서 야자, 망고, 두리안 등의 맛난 과일이 대거 출하되는 것도 이때다. 시장은 활력을 찾고, 축 처져 있던 사람들이 생동적이고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장마’를 ‘우기’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자연 현상의 배경이 다르고, 집중호우의 형태가 다르고, 이를 소화하는 방식도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장마철에 막걸리와 파전을 찾는 이유가 대표적이다. 마음은 꿀꿀하고 몸은 축 처지는 것을 달래는 풍류랄까.


삼계탕, 매운탕, 김치찌개, 수제비 같은 국물 요리도 장마철 음식이다. 덥고 꿉꿉한 시기에 뜨거운 국물을 먹는, ‘요상한’ 식습관의 배경은 무엇일까. 육체적 건강을 위한 보양식 용도와 함께 높은 습도, 일조량 부족으로 일어나는 정서적 허기를 따뜻한 국물로 달래려는 의도도 있다. 외부 환경으로 인해 심신의 균형이 깨질 때, 음식으로 밸런스를 잡는 의식적 행위.


지역별로 장마철 음식이 다르기도 하다.

경상도는 얼큰시큼(생선찌개, 매운탕, 전골), 전라도는 짜글짜글(짜글이, 홍어찜, 묵은지찜), 강원도는 담백(황태국, 막국수, 옹심이), 충청도는 구수(수제비, 청국장, 애호박국)를 취한다.


개인적으로 장마철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사람들도 있다. 홍수에 떠내려간 친구, 아이들을 구하려 뛰어들다 요절한 선배, 그리고 섬진강가로 귀촌해 장마철마다 분주한 후배 가족의 안위도 어김없이 떠오른다.


기상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장마는 한 달을 넘기지 않는다. 실제 비 내리는 날은 15~20일 정도(이 시기에 1년 강수량의 1/3이 내린다나)다. 길지 않은 꿉꿉함을 넘어서면 햇빛 짱짱한 가을이 온다는 것도 어김없는 사실이다.


※ 참고로 ‘장마’는 한자어가 아니다. 긴 長과 ‘비(雨)’를 뜻하는 고유어 ‘마’가 합쳐진 순우리말로 인정받는다. 사냥과 산행(山行)의 관계와 비슷하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장마를 ‘매우(梅雨, 매실이 익을 때 내리는 비)’로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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