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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쉬는솜사탕 Dec 23. 2022

나의 달콤 쌉싸름한 결혼식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읽고 보시면 이해가 쉬우실 것 같아요^^

내가 걸었던 결혼의 조건



결혼을 하기로 했고, 룰루랄라 신혼여행까지 다녀온 것은 좋았는데, 여전히 머리에 뿔이 나있었다.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회의적이기도 했지만, '결혼식' 자체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다. 270도쯤 삐뚤어진 예비신부(아, 이 단어 자체도 얼마나 간지러운가.)였다.



일단 결혼식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껏 뿌린 것들을 알차게 거두어들여야 하는 양가 부모님께는 가당찮은 일이었다. 양가의 개혼이기도 하고, 부모님의 자랑인 딸, 아들을 내보이고 싶은 어른들의 은근한 마음을 모르는 척하기는 힘들었다. 



결혼식의 형식적인 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똑같은 식순, 누구의 결혼식에 읊어도 상관없을 비슷비슷한 주례사들, 노래를 곧잘 하는 지인의 축가 한 곡. 30분짜리 참치 통조림이 주말마다 전국의 웨딩홀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 형식을 위한 형식 속에 나를 세워야 한다는 사실이 마뜩잖았다.



물론 '주례 없는 결혼식'을 치르는 커플들도 생겨나는 추세였지만, 결혼식 자체에 큰 의지가 없었다. 후다닥 해치울 생각이었기에, 애써서 공을 들일 생각은 없었다. 눈 딱 감고 그 누구의 기억 속에도 특별하게 남지 않을 무난하고 평범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우리 행사가 아니라 부모님의 행사니까. 우리의 인생의 궤적과 전혀 상관없는 '강남'에 있는 적당한 크기의 웨딩홀을 잡았다.



아무리 형식적인 예식이라고 해도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아빠 손을 잡고 입장하고 싶지는 않았다. 신부가 아빠에게서 신랑에게로 인도되는 것은 싫었다. 당당하게 동등하게, 신랑과 함께 입장하고 싶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니까. 나의 보호자는 나니까. 



그러나 아빠에게  '아빠, 저는 이 남자에게서 저 남자에게로 건네어지고 싶지 않아요. 저는 남친 손잡고 같이 입장할래요.'라고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는 못했다. 아빠는, 딸의 손을 잡아주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말은 못 하고 속만 끓이고 있을 때, 생각지도 않게 아빠가 먼저 말을 꺼내셨다. "너희 둘이 주인공이니까 너희 둘이 같이 입장해라. 늙은 사람이 올라가서 뭐하겠노." 속으로 '올레!!!'를 외쳤다. 



그제야 30분짜리 통조림일지언정, 양파도 살짝 얹고, 통후추도 뿌려서 약간의 풍미를 내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나는 신부대기실에 앉아있고 싶지 않았다. 양가 부모님과 신랑은 식장 앞에서 손님들을 맞는데, 나 혼자 공주처럼 신부대기실에 앉아있는 건 싫었다.  환한 조명과 꽃으로 둘러싸인 신부대기실에서, '제가 오늘의 주인공이에요'라는 듯한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있는 나를 상상하면 머리를 쾅쾅 찧고 싶었다.(그렇다. 오글거리는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부모님과 함께 서서, 단단하게 나의 결혼식에 오신 손님들을 맞이하고 싶었다.



물론 한복 속치마 다섯 배 부피의 드레스로는 식장 문 앞에 서 있을 수 없었다. 최대한 퍼지지 않고, 끌리지 않는, 심플한 디자인이어야 했다. 드레스숍을 고를 때부터, 벨라인으로 화려하게 퍼지는 것이 아닌, 최대한 똑떨어지는 드레스가 있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플래너에게 부탁했다. 신부 대기실에 앉아있지 않겠다는 나의 의견에 다들 어리둥절해했지만, 드레스숍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해치우려던 결혼식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식장 앞에서 엄마 아빠로부터 많은 분들을 소개받고 인사를 나누었다. 하객들은 신부가 서 있는 모습을 신기해했지만, 참 좋다며 손을 잡아주셨다.



결혼식이 시작되고 둘은 연단의 끝에서 함께 출발하고 함께 도착했다. 주례사가 끝나고 남편은 내가 부탁했던 이승환의 '화려하지 않은 고백'을 축가로 불러주었다. (남편의 목청이 좋지 않다는 사실은 우리 둘만 몰랐었나 보다.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덕분에 식장 분위기는 더없이 화기애애했다.) 



하루의 북새통을 치르며, 일생에 단 한 번 누릴 수 있는 하얀 실크 같은 행복을 맛보았다. 통조림 속에서 아주 잠깐 동안 세상의 주인공 흉내를 내 본 것이 그렇게 특별하게 기억될 줄이야. 


하기 싫다고 싫다고 잔뜩 뿔을 낼 때는 언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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