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삶도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운전면허 실기시험에서 두 번이나 떨어졌다는 글을 읽은 독자라면, 이쯤에서 왜 면허를 시작하게 됐는지 궁금해지리라. 독일에서 운전면허 비용은 중고차 한 대 값으로 무시무시하고, 시험도 깐깐한 줄 알면서 면허를 시작한 이유.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할 때 우리의 발이 되어준 건 자전거였다. 한국에 살 땐 한강고수부지에나 가야 놀이삼아 가끔 타보던 것이 자전거. 독일에 오니 대중교통비가 너무 비싸 손이 떨려 티켓을 살 수 없었고, 모든 곳을 걸어 돌아다니기에는 벅찼다. 돈이 들지 않으면서 맘껏 돌아다니려면 자전거 만한 게 없었다. 거기다 자전거 뒤에 트레일러를 연결하면 아이도 태울 수 있고, 장도 봐올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자전거로 누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이들 태우고 유치원을 오가고 마트를 오가고, 날이 좋으면 근교로 나가 바람쐬고 놀이터도 이 동네 저 동네로 찾아다니며 즐겼다. 자전거를 타니 운동도 되고 허벅지 근육도 튼실해지고 건강에도 좋았다.
자전거가 친환경적이라 독일 사람들도 즐겨타는 교통수단이다. 문제는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하고, 눈이 오면 길이 미끄럽고, 한여름에는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야 한다. 아이가 아파 병원을 가야한다거나 체력이 따라주지 않는 날에는 이 상황이 나를 처절하게 했다. 거기다 오르막이 계속 된다거나 자동차에 위협을 받을 때면 이를 악물어야 했다. 자전거로 다닌 추억에는 즐거웠던 감정과 지독한 피로가 함께 버무려져 있다.
우리의 형편이 좋아져 중고차를 구입했을 때는 상황이 나아졌다. 자전거로 가기 힘든 곳은 남편이 운전 해 데려다주었고, 장을 볼 때도 차를 사용하니 편리했다. 무거운 것을 지고 나르는 수고가 줄었고, 가고 싶던 곳을 편히 갈 수 있다는 기쁨이 생겼다. 문제는, 이 편리함을 남편이 있을 때만 누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면허였으니!!
남편은 유학기간 내내 도서관을 다녔다. 고로 집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아이 유치원을 데려다줘야하는데 장대비가 내려도 자전거를 타야했고, 몸이 힘들고 피곤해 꾀를 부리고 싶어도 자전거를 타야 했다. 장을 보러 가야하는데 남편이 없으면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뒤로 하고 자전거를 타야했다. 속이 쓰렸다. 일주일 내내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차, 있어도 없는 것과 같은 차, 차는 있는데 면허가 없는 자, 탈 수 있어도 타지 못하는 자, 바로 나!!!
면허를 왜 따지 않았는지 후회스러웠다. 지난 일에는 미련을 두는 성격이 아닌데 면허만큼은 후회스러웠다. 한국에서 딴 면허는 독일에서 독일면허로 교환할 수 있다. 독일에 살다가 한국에 잠깐 방문해서 면허를 따는 건 허락되지 않는다. 최소 6개월 이상 한국에 거주해야 인정해준다. 독일에서 면허 따는게 많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주워듣고 언감생심 독일에서 면허 딸 생각은 꿈도 꾸지 못 했다. 3천유로라는 얘기에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독일에 산 지 13년이 되었다. 13년이 지나는 동안 배짱이 두둑해진 건지 더 늦기 전에 면허를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남편에게 기사 노릇을 맡기고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날 수도 있고 운전을 못할만큼 병들 수도 있는데 그때 가서 아무 것도 못하는 처지에 놓이고 싶지 않았다. 기력 약한 노인이 되어 혼자 병원을 다니거나 장보는 일로 절절 매고 싶지 않았다. 그때 가서도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차를 보며 속 쓰려 할 수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내 삶이 한계에 갇히지 않길 바랬다. 운전을 못 한다는 이유로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에 한계를 긋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직장을 다닌데도, 사업을 시작한데도, 운전이 내 발목을 잡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얽매이지 않는 삶, 한계가 없는 삶, 자유로운 삶,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는 삶. 그것을 바라고 운전면허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