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솔아의 “최선의 삶”을 읽고
2023년도는 드라마 ‘더 글로리’의 해였다. 유년의 영혼을 살해한 가해자들을 향한 치밀한 복수극. 합당함과 공정함이 없던 비열한 그 시절, 치기 어리고 철없던 실수로 치부하여 침몰당한 사건들을 첨예하게 끄집어내 통쾌한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를 보여주는, 그동안 전무후무하던 영상이었다.
『최선의 삶』을 읽고 책을 덮었을 때 학교 폭력을 다룬 ‘더 글로리’와 영화 ‘박화영’이 떠오른다. 다만, 영상에선 느낄 수 없는 소설적 특성의 내밀한 고백과 날것의 표현들이 속수무책으로 들이닥쳐 가슴이 저릿해진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들은 대부분 단문으로 이루어져 얼핏 긴 시 구절을 읽는 듯한 착각이 일기도 한다. 『최선의 삶』은 대학소설상 수상작으로 파란색 표지 하단 띠지엔 심사평의 한 줄 평이 적혀 있다. ‘다른 응모작들과 ‘체급’ 자체가 다른 소설이었다.’ 이 한 줄은 전무한 이 소설을 관통하는 표현이다.
드라마 제목 ‘The Glory’는 영광을 뜻하는 영단어이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내용은 없다. 다만, 영광의 단어 뜻풀이로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라는 표현대로 가장 순수하고 영예로운 유년기에 겪었던 상처를 비유한 것이라면, 학교폭력은 한 번뿐인 나의 품위와 영예를 죽임당하는 것이다.
『최선의 삶』의 제목 또한, 학교 폭력을 다룬 내용에 ‘최선’이란 긍정적 단어가 주는 표현은 어쩌면 모순이며 역설로 느껴지지만, 책을 완독한 이후엔 비유이자 상징임을 확신할 수 있다. 즉, 영광과 최선은 폭력으로 훼손된 ‘한 번뿐인 존엄’을 상징한다. 덧붙여 책 읽기를 마친 독자들에게 은연중에 던지는 질문인 셈이다.
최선의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주인공 강이는 가족들이 키우는 반려견 강이와 동일한 이름이다. 강아지의 강이, 순진 무결한 그 이름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이가 직접 지은 이름이다. 강아지 강이가 꼬마였을 때 멍청한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우니 더더욱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이는 강이라는 이름으로 한 가지 생각과 탐욕밖에 모르는 동물적 습성을 강아지 강이와 자신에게 투영한다. 덧붙여 좋거나 싫어하는 감정들을 확고하게 드러내며 순수하거나 본능에만 충실한 자신의 반려견 같은 모습을 나타낸다. 자아의 자각 과정인 동시에 유년기의 미욱함이다. 어린 시절에 으레 그렇듯 시야가 좁고 세상 물정을 몰라 미숙하고 어수룩한 모습을 자꾸만 보여주듯이 말이다.
반려견 강이가 유독 눈이 오는 날을 무서워하고 좋아하기에 강이에게 스노볼을 사주거나 사계절 내내 눈이 쏟아지는 곳에 함께 데려가서 눈을 실컷 맞고 눈에 익숙해져서 무서움이라는 감정을 없애주고 싶다고 순진하게 생각하지만, 오히려 익숙해질수록 더 진저리 쳐지는 무서움도 있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몰랐다고 고백한다. 양극과 음극,선과 악같은 뚜렷한 메타포에서 어쩌면 가장 애매하고 중간 같은 강이는 양단의 인물인 소영과 아람에게 각자 다른 방식으로 희생당한다.
『최선의 삶』은 흔하고 보편적이지만 결이 다른 성장소설이다. 비싼 동네 전민동에 사는 소영과 가난한 읍내동에 사는 강이, 그리고 더 가난한 아람, 연구원 자녀들이 모여 있고 명문고 입학률이 가장 높은 전민중학교에서 만난 이들 셋은 가장 친한 사이지만 곧 가장 나쁜 사이로 전락한다. 동반 가출까지 일삼으며 유대를 나눈 친한 여자 중학생 세 명의 그릇된 비행, 원초적 관계에서 벌어진 균열의 서사는 1980년 초반부터 1990년 중반 출생자인 Y세대(밀레니얼)만의 거친 이야기가 얽히고설켜 벌겋게 벌어진 생살처럼 날것 그대로 담겨있다.
가난하지만 학군을 위해 위장 전입신고로 입학한 학교에서 우연히 소영이를 만나 친해져 버린 게 강이의 과오인 것일까, 고급 아파트에서 번듯하게 살며 부모에게 반기를 들기 위해 가출을 주도하며 친구들을 짓밟던 소영이의 어린 객기가 필연적 오류인 것일까. 가정이나 학교가 우열로 구분된 사회적 성층이라면 거기에서 따라오는 관계성도 매한가지다. 계급에는 결코 나이가 중요치 않듯이 말이다.
그녀들은 똑같이 가출했지만, 결과는 가정사에 따라 뚜렷이 달라진다. 소영은 가출을 무기 삼아 결국 모델학원 등록비를 받아내 소원을 이루지만, 아람은 그 정반대이다. 아빠에게 앞니를 뽑아야 할 정도로 맞고, 머리칼을 밀린다. 심지어 돈이 없어 임플란트 대신 조악한 보조 앞니를 끼운 채로 현실을 원망하며 조금씩 비뚤어진다. 둘은 똑같은 행위에도 양극의 결과를 나타낸다.
집에 돌아와 줘서 고맙다고 꽃다발과 기도 세례를 받은 강이가 비교적 평범한 중간의 가정사라면, 소영과 아람의 가정사는 지극히 정반대이며 극단적이다. 사회 기저에 깔린 계층적 구조처럼 말이다. 셋이 나란히 치마를 줄이고 빼앗겨도, 소영은 엄마로부터 길이가 다른 치마 두 벌을 받아냈고, 아람은 치마 없이 체육복을 입고 다녔고, 강이는 엄마가 사정하여 돌려받은 치마를 늘려서 입고 다닌다. 이렇게 판이한 결과 때문에 세 사람이 우정이란 이름으로 산전수전 가출까지 함께하던 유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한순간에 죽마고우에서 철천지원수로 전락한다.
이 대목에선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이 떠올랐다. 잘되는 집안은 다들 비슷하게 근심이 없고 건강하며 화목하지만, 안되는 집안은 애정이든 금전이든 자녀든 천차만별의 이유로 불행해진다는 뜻이다.
삶이 비슷한 우정은 고만고만하게 무탈하지만, 삶이 다른 우정은 바뀔 리 없는 바탕에 기대어 비교하고 따돌리며 천차만별의 이유로 불행해지는 것일까. 유년기에 목매달던 조악한 관계성은 이 이야기의 주제 의식이며 소설 속 사건 기저에 깊숙이 깔려 있다. 어린 사춘기는 가장 미욱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거칠고 나쁜 관계만을 힘껏 끌어안는다. 착각은 자유지만, 그 눈앞의 자유 속에서 보이는 유일한 세계는 바로 우정이란 관계성 하나뿐이다. 그래서 서로의 사랑과 애정과 질투를 갈구하며 순수하지만 가장 영악한 치기로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셋으로 똘똘 뭉친 중학생 여자아이들의 가출은 서툴고 미련한 사춘기이자 그 나이대에 가장 쉬운 일탈이다. 아이들은 가져온 돈으로 성인을 흉내 내려 새 옷을 사 입고, 난생처음 미용실에서 값비싼 머리를 한다. 옥상이나 계단 아래에서 노숙을 자처하며 즐기는 일탈은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득이 될 게 없다. 자아를 찾기 위한 선택은 어쩌면 자아를 쉽게 잃어버릴 수 있는 실수로 번질 수 있고, 나쁜 성인 남성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돈이 없는 아이들은 아저씨와 오빠들에게 밥과 술과 잠자리를 얻어내고 위험한 가출을 유지하다가 결국 아람이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한다. 그럼에도 아람은 그 질 나쁜 남자들에게도 자신이 꼭 필요했다며 자신의 행위를 동정과 합당함으로 포장한다.
생리를 가장 먼저 시작한 소영은 하얀 바지에 번진 동그란 피자국을 참지 못한다. 추적을 감수해서라도 훔쳐 온 부모님 신용카드로 굳이 처음 샀던 크림색 새 정장 바지를 골라 사 입고, 현금인출기로 돈을 뽑아 청주로 가서 원룸을 얻어 생활한다. 돈과 자존감이 큰 권력자인 소영은 우정이란 이름으로 가출을 주도하고, 집에 다시 되돌아가는 것조차도 자신만의 권력으로 통보한다. 가출은 알지 않아도 될 것들을 알게 하며 손해를 입게 되는 행위인데, 소영의 도구로 이용된 아람과 강이는 당시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람은 주워 온 길고양이에게 의지하지만 소영은 아람의 고양이 인중에 담배로 불을 지진다. 강이는 점점 양극화되는 소영과 아람, 그 둘의 틈으로 흡수되듯 어우러진다. 또 이따금 소영과 함께 옷을 벗고 서로의 젖꼭지와 살을 핥고 성애적 관계를 즐긴다. 급격한 생리적, 신체적, 지적 변화를 경험하는 그 난해한 유년기는 아직 자아 확립이 이뤄지지 않음을 대변하는 미성숙한 표상이다. 우정과 사랑을 구분 지을 수 없고, 그 허물어진 경계에서 올바른 선택이나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홀수로 이뤄진 세 사람의 관계라면 더더욱 그랬으리라.
그러나 끝내 양극화 사이의 중도에 있던 강이는 결국 소영과 아람의 미세하게 벌어진 균열의 틈에서 처참하게 부서지고 산산조각 난다. 아람은 자신에게 나타난 불행을 전부 소영에게 전가한다. ‘다 소영이 때문이야.’라던 아람이 소영을 피하게 되고, 강이는 그 사이에서 미숙하고 이율배반적인 중립을 선택한다. 아람을 따르면서 소영을 배신하는 느낌을 지우기 위해 소영을 더 좋아하려 하지만, 강이의 집에 소영이 홀로 찾아왔을 때 강이는 애써 무시하고 만다. 강이가 소영의 멋진 모습을 제멋대로 재단하며 초라한 손길을 거부할 때, 소영은 어울려 다니는 무리 중 한 명의 친구를 본보기 삼아 두들겨 패서 어깨뼈를 부러트리고 기어코 전학을 보내버린다. 폭력을 행사한 건 소영이지만, 관계와 권위의 꼭대기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자는 도망쳐야만 했다. 그 시대의 공교육은 공정치 못했고, 되려 승리를 거머쥔 가해자가 떳떳한 시대였다. 아람도 결국 소영에게 조용히 굴복했고, 두 사람은 자신들이 자연스럽게 손을 잡을 수 있도록 그 모든 화살을 강이에게 돌려 버린다. 영악한 양단의 그녀들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에게 선택을 강요하며 결국 중립인 강이를 재물처럼 바쳐 무릎을 꿇리고, 옷을 찢고, 잔혹하게 짓밟는다. 영예롭진 않더라도 적어도 평범해야 할 강이의 유년기는 그렇게 유린당하고 만다.
결국 강이는 부모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중립과 공정이 마땅해야 할 학교는 가장 편애적이다. 학교는 강이의 편에 서 주지 않았고, 도리어 위장전입을 협박으로 다 같이 자퇴할지, 학교 다니는 대신 이 일을 깨끗하게 묻을지를 물으며 사납게 강요한다. 끝내 강이는 무리로부터 좆밥 소리를 들으며 사건을 덮듯이 묻고 두려움에 떨며 가방 속에 식칼을 몰래 넣고 등교한다.
강이는 학교에서 자신이 깨달은 방식을 바둑으로 표현했다. 타인들은 쥐고 있는 돌멩이를 꾸준히 쥐는 방식이고, 강이는 먼 곳에 놓인 돌멩이를 멀리 보는 방식이라면, 소영은 그 돌멩이의 위치를 파악하고 마치 바둑처럼 수를 놓는다고 말이다. 결국 강이는 모든 걸 겪어낸 뒤에야 영리함으로 포장된 영악함과 넘을 수 없는 원초적 벽을 뒤늦게 깨달았고, 뒤를 돌았을 땐 아람도 없고, 자신의 영예도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만다.
어느 시절이든 그 시대만의 결핍이 있기 마련인데, 그 시대는 굳이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 짓지 않던 시대였고, 도리어 책임을 마치 불덩이처럼 피해자에게 던지듯 전가하던 시절이었다.
‘애들이 뭘 알겠어, 애들 장난을 갖고 뭘.’
유년의 무수한 감정과 마음을 명징하게 따지지 않고, 단순히 사사로운 일로 규명해 버리곤 했다. 동시에 치기와 미숙이란 표현으로 장난이란 사소함으로 뭉개버린 뒤 암암리에 매장해 버렸다. 그랬기에 범람하는 대중 컨텐츠 속에서도 학폭을 다룬 ‘더 글로리’와 ‘박화영’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고, 이 책 『최선의 삶』 이 출간된 지 6년 만에도 독립영화로 영상화된 까닭이다.
총 스무 개의 목차 중에서 상징적인 ‘스노볼’은 수미상관법 구조처럼 처음과 마지막에 제시하여 앞으로 벌어질 잔혹한 사춘기를 예견한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햇수가 지나도 생살이 돋지 않는 그 벌건 열여섯의 마음으로 돌아간 강이는 자신을 폭력으로 짓밟았던 소영의 목울대에 칼을 찔러 넣는다. 소설 속에서 줄곧 복선처럼 묘사되던 ‘과거의 기억에 시달리던 임 씨가 어느 날 유 씨를 살해한’ 것처럼 말이다.
소영은 몇 년 만에 만난 강이를 알아보며 ‘읍내동에 사는 애’라는 계층적 비하와 찔러보라며 비웃고 명령하며 다그친다. 찌르지 못하는 강이를 향해 비웃으며 ‘병신’이라고 조아리는데 어린 가해자의 도발은 끝끝내 비열해서 피해자는 기어코 가해자를 찌르는데 성공한다. 수 년 전, 그때처럼 피해자가 진짜 가해자가 되어버린다. 죽이려는 행위는 결국 미수에 그쳤지만, 수년간 품고만 있던 마음으로 끝끝내 가해자를 찔러야 했던 강이의 칼은 이상한 방식으로 소영의 오랜 꿈을 이루게 한다.
열여섯에도 꼭 그랬던 것처럼 가해자와 피해자가 순식간에 뒤바뀌고, 준 연예인이었던 소영이는 ‘찜질방 천사’로 둔갑하여 뉴스에 오르내린다. 최선을 다한 강이는 어쩌면 더 나아지기 위해서 기꺼이 더 나빠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소설 속 강이와 소영와 아람은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했다. 떠나거나 버려지거나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기꺼이 더 나빠졌다는 표현처럼, 그게 그들의 최선이었다.
강이가 소영에게 칼부림을 한 뒤, 작은 스노볼 안에 몰아치는 눈발처럼 첫눈이 소복이 내린다. 숫눈은 아무렇게나 밟을 수 있고, 그 새하얀 숫눈 위에 찍힌 더러운 발자국은 금세 다시 지워지지만, 이미 한 번 밟힌 숫눈은 여전히 지저분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대목에선 가장 영예로울 순간인 유년기의 생채기는 어떤 이는 끝끝내 아물 수가 없다는 주제 의식을 선연히 드러낸다.
한 번뿐인 소중한 유년기를 폭력의 기로에 놓인 관계성에 온 힘을 몰두하여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면 그건 과연 올바른 최선일까? 최선의 삶이 결국 과정이나 실재에 근거하지 않고 오로지 그 목적만을 위한 달성이라면 그런 최선은 無보다 못하다. 악플을 ‘표현’ 혹은 ‘관심’으로 빗대는 이들에게 그럴싸하게 포장된 ‘악플’은 단 한 개도 필요 없고, 오히려 무관심이 훨씬 낫다는 결론을 성토하고 싶다. 무자비한 욕설과 우악스러운 낙서가 낙인된 종이보다 차라리 새하얀 도화지가 더 낫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말이다. 괴롭거나 기쁘거나 슬프거나 강렬한 기억들은 영원한 법인데, 아프게 점철된 영원 같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결국 버텨내는 것과 매한가지다. 삶이란 살아가는 것과 동시에 살아지는 것인데, 마치 공기처럼 숨 쉬듯 흘러가는 그 삶을 일분일초 매 순간을 견뎌내야 한다. 아직 덜 죽은 영혼의 빈껍데기를 끌어안고, 유린당한 내 명예를 떠올리면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그 삶이 온전한 삶일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야 한다. 열과 성의를 다해 최선으로 말이다.
혹자는 타고난 기질이나 좋은 운을 지닌 덕분에 그 더러워진 폐수가 담긴 자신의 물컵 안에 행복하고 긍정적인 맑은 물을 콸콸 쏟아부어 내서 나쁜 경험과 기억을 깨끗이 정수할 수 있지만, 타고난 기질이나 운이 없다면, 신선하고 맑은 물을 붓지 못해 폐수가 고여 썩고 또 썩어 메말라가듯 쪼그라들 것이다. 안타깝게도 폐수 같은 기억을 지워내지 못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 그래서 감히 말하고 싶다. 학교폭력이라는 명칭은 ‘유년살해’로 변경되어야 한다는 것을.
『최선의 삶』 은 대학소설상 수상작답게 책 말미엔 심사위원들의 인상적인 심사평이 적혀있다. 결코 기발하고 특별한 소재에 기댄 소설은 아니지만, 특별하지 않은 소재를 특별하게 만들었다는 평이다. 결이 다름의 정확한 해석이다. 덧붙여 이 소설이 서술하고 있는 이 모든 슬프고 아픈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는다고 적혀있다. 공감하는 바이다. 재기발랄한 나이대 주인공들에게 벌어지는 일련의 서사와 날것의 감정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이 아릿하고 서늘해진다. 직접 겪은 일들이 아니라면 감히 사용할 수 없는 문장과 표현들 덕분이다.
소설과 문학은 허구적 상상과 실재할 만한 서사를 창작이라는 실로 탄탄하고 구조적으로 엮어내는 과정이다. 임솔아 작가의 소개란에 ‘내가 쓴 글들이 대신 말해줄 것이다.’라는 표현대로 문장이 그 모든 것을 대변해 준다. 악몽 속에 평생 갇혀 살까 봐 무서워서 나의 악몽에 최선을 다하며 소설을 완성했다는 것처럼, 『최선의 삶』은 결코 허구만이 아니며, 무수히 작거나 크거나 다채로운 최선의 삶을 지켜낼 독자들에게 전하는 고백적 편지인 셈이다.
‘살아야겠어서 내 마음대로 상상했고 곁에 묶어두었던 내 친구 아람에게’ 라는 작가의 자백 같은 수상소감처럼 실재했거나 실재할 법한 미숙한 유년기는 결코 나만의 상처만은 아니다. 그래서 이미 지나갔거나 지나고 있을 수많은 강이와 아람을 따뜻하게 격려하며 위로한다. 잔인하고 치기 어린 우정, 치열했던 우리의 미욱한 사춘기를 물처럼 흘려보내며 부디, 견디는 삶이 아닌 영예롭고 소중한 최선의 삶을 지켜낼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