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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예의 『오렌지와 빵칼』을 읽고

“자유는 때때로, 추함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다.”

by 발렌콩


2024년 여름, 상큼한 감촉의 과즙 같은 표지에 빵칼이라는 섬뜩한 단어가 나란히 붙은 중편소설 『오렌지와 빵칼』이 도서관 진열대에 조용히 놓였다. 발랄하고 건강한 과일 하나, 그리고 둔하지만 무심하게 무언가를 가를 수 있는 칼 하나. 제목부터 알 수 없는 긴장을 안긴다. 과연 왜 하필 오렌지이고, 왜 빵칼인가.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책장을 덮고 나서야 서서히 해석되기 시작한다. 추한 자유, 무딘 해방. 그리고 그 이면의 잔인한 고백.


‘오렌지와 빵칼’이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머릿속엔 쉽게 어울리지 않는 두 이미지가 부딪혔다.


상큼한 과일과 무딘 칼, 생기와 폭력, 무해함과 위협. 마치 서로 다른 장르에서 온 단어들이 우연히 한 문장에 놓인 듯한 위화감. 그러나 곧 깨닫게 된다. 이 제목은 단순한 조합이 아니라,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세계의 핵심 비유라는 것을. 부드러움은 언제나 상처받기 쉬우며, 무딘 도구조차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잔혹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청예 작가의 중편소설 『오렌지와 빵칼』은 그런 제목처럼, 겉은 말갛고 평온하지만 속은 문드러지고 뒤틀린 관계들 속에서 인간 내면의 통제를 조용히 해체한다. 읽는 내내 독자는 주인공 오영아의 억제된 감정과 정교한 붕괴를 따라가며, 자유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자꾸만 묻게 된다. 빵칼로 오렌지를 자를 수는 없지만, 쑤실 수는 있다는 문장처럼 말이다.


1. “빵칼은 오렌지를 썰 수 없지만, 쑤실 수는 있다.”

책의 뒷표지에 실린 이 문장은 소설의 주제의식을 농축한 선언처럼 다가온다. 무딘 칼날로 오렌지를 썰기보단 ‘쑤신다’는 표현은 단순한 비유를 넘어선다. 그것은 통제되었던 인물이 자신의 욕망을 해방하는 방식이기도 하며, 억눌린 이성의 감옥을 뚫고 나오는 한 여성의 분출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기세 있게 썼다. 욕먹을 각오를 하고”라는 고백을 한다. 그리고 독자는 그 ‘욕먹을 각오’가 무엇이었는지를 뒤늦게 알아채고 충격에 휩싸인다.


『오렌지와 빵칼』의 주인공 오영아는 유치원 교사다. 남을 배려하고, 자신을 통제하며 살아왔던 모범적인 청년 여성. 그러나 그녀는 내부의 균열을 감지한 뒤, 무료 상담을 명분으로 뇌시술을 받는다. 이후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눌러져 있던 감정이 폭발한다. 그리고 통제라는 이름으로 쌓아왔던 관계들은 하나 둘 무너져내린다.

이 소설은 심리미스터리라는 장르 안에서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인문학적 질문을 던진다. 자유는 무조건적인 해방일까. 아니면 절제된 균형 속에서만 아름다울 수 있는가. 작가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다만, 독자로 하여금 그 답을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되뇔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2. “통제와 해방은 짝꿍이라, 함께 있을 때 더 빛난다.“

오영아의 통제는 자신을 위한 것이었을까, 타인을 위한 것이었을까. 그녀가 수년간 지켜온 이성의 균형은 겉으로는 도덕이었지만, 사실은 두려움의 장벽이었는지도 모른다. 통제라는 이름 아래 감정을 지운 그녀는,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추함을 드러내는 데까지 이른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본래 얼마나 모순적인 존재인가를 보게 된다. 자유를 꿈꾸면서도 자유가 주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도덕을 추구하면서도 그 도덕이 자신을 억누르는 족쇄임을 깨닫게 되는 아이러니.


『오렌지와 빵칼』은 흑백의 이분법으로 인간을 나누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감정, 선택, 행동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복잡하고 세밀한지 드러내 보인다. 청예 작가의 문장은 군더더기 없이 명확하면서도 서늘하다. 특히 “고상한 행복은 천박한 불행을 이길 수 없었다”는 문장은 독자의 가슴을 겨눈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고상하게 웃으며 참아내는 삶을 살아갈 때, 누군가는 천박할 만큼 솔직한 분노로 모든 것을 뒤엎는다. 오영아가 그런 선택을 했고, 우리는 그 선택을 ‘비정상’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3. “삶은 이런 식으로 노력을 자주 빗겨갔다.”

소설은 인간이 도덕적 존재이기를 강요받는 사회 속에서, 오히려 도덕이 폭력으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패배가 정해진 게임”에 참여하는 것 같은 불합리, 무수한 개미 떼처럼 살아가는 일상의 부조리, ‘살인자’라는 명칭만 남겨진 채 정체성이 삭제되는 해방. 이러한 주제들은 단순히 서사적 장치가 아니라, 현실을 향한 작가의 은근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독자에게로 향한다.


『오렌지와 빵칼』은 무엇보다 ‘관계’를 묻는다. 관계란 서로를 존중하는 감정의 총합인가, 아니면 말 못할 이기심과 권력의 거래인가. 친한 친구 은주, 연인 수원, 유치원 아이의 엄마와의 얽힘 속에서 오영아는 늘 자신을 ‘악인이 되지 않으려는 사람’으로 유지한다. 그러나 그 삶은 “마음 안의 용수철을 꾹 눌러두는 것”에 불과했으며, 언젠가 그것은 반드시 튀어나오게 되어 있다.


4. "우리 모두를 위한 반전"

작품의 말미에 이르러 밝혀지는 반전은 단순한 플롯의 뒤집기가 아니다. 그것은 독자의 도덕적 위치를 전복시킨다. 처음부터 오영아를 이해했던 독자조차도, 그녀의 행위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소설에서 던지는 핵심적인 질문은 결국 이 한 문장으로 응축된다.


“나는 너를 존중할 수 있다. 단, 네가 나를 존중할 때만.”

이 얼마나 공정하고 당연한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현실 속에서는 이 단순한 조건조차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5.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추함, 그리고 삶이라는 이름의 인과”

『오렌지와 빵칼』은 자유의 실체를 다시 묻는다. 진짜 자유는 무엇인가. 도덕을 벗어나야 가능한가. 억압 없이 가능한가. 추함과 고상함, 해방과 통제, 그 모순된 가치들의 충돌 속에서 결국 이 소설은 말한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는 빵칼 하나씩이 쥐어져 있다고. 그것이 무디건, 날카롭건, 결국 어떤 날엔 그것으로 나를 지키거나 타인을 찌르게 될지도 모른다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오렌지 같은 세상을 상처 내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오렌지는 우리가 쥔 칼끝에서, 문득 터지고 만다.


『오렌지와 빵칼』은 누군가의 분풀이이자,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부디, 당신이 쥔 칼은 오렌지를 해치지 않기를.


혹은,

이미 터진 오렌지 앞에서도

스스로를 너무 미워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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