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떤 하루 Dec 17. 2020

늦은 겨울밤엔 뜨개질과 마음 수양

겨울이 시작됐다. 삿포로는 진작에 겨울이긴 했지만 올해는 눈도 안 오고 기온도 높아서인지 좀처럼 겨울 맛이 안 났다. 이렇게 눈이 제때 안 와주면 뒤늦게 눈 폭탄이 내리는 게 아닐까 걱정되는 걸 보니 나도 이제 삿포로 사람 다 된 것 같다. 


요 며칠 눈발이 사정없이 휘날렸던 걸 보니 의심의 여지없이 삿포로의 겨울이 시작됐다.


겨울은 밤이 길어서 인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매년 겨울이 되면 밤마다 무언가를 뜨게 된다. 한때는 털 모자에 꽂혀서 털 모자만 뜨다가, 작년에는 손목 워머를 왕창 떴다. 올해는 양말이다. 겨울이면 매일같이 눈이 오니 외출 시 모자는 필수고, 추운 집구석에서 수족냉증을 달고 살다 보니 손목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워머도 없어선 안 될 필수템이 되었다. 양말도 마찬가지다. 일본 집은 보통 바닥 난방이 없기 때문에 집 안에서도 양말, 슬리퍼는 필수다. 이렇게 따져보니 겨울마다 무언가를 뜨는 건 패션을 위해서라기 보다 거의 생존을 위한 행위인 것 같다. 


이게 뭐라고 뜨다 보니 잘 뜨고픈 욕심내지는 오기가 생긴다. 처음엔 백엔샵에서 백 엔짜리 실과 바늘로 뜨기 시작했는데, 정신 차려보니 뜨개실 전문 스토어에서 양말 전용 실을 장바구니에 담고 있는 나... 양말 전용 실은 보통 한 뭉치에 천 엔 이상하기 때문에 재료비와 시간, 수고를 생각하면 그냥 사서 신는 게 훨씬 낫다. 그런데도 양말 뜨기를 멈출 수 없다. 한 올 한 올 뜰 때마다 잡념이 사라지는 동시에 하루 동안 다 소비되지 못한 에너지를 쏟을 수 있고, 무엇보다 다 뜨고 나면 성취감이 크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로 생각한 대로 모양이 점점 갖춰져 가고, 쏟은 시간과 수고만큼, 딱 그만큼으로 완성되는 정직함. '운'이 좋아서 잘 떠지고 안 떠지고도 없다. 오로지 내 손끝에서 시작해서 내 손끝으로 완성된다. 지극한 단순노동에 불과하지만 내 맘대로,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상을 살다 보면 이 정직함에 왠지 모르게 마음 따뜻해진다. 온 신경을 실 뭉탱이에 쏟는, 이 쓸데없는 행위가 복잡한 머릿속을, 마음을 조금은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고 할까. 


기나긴 겨울이 시작되었으니 몸도 마음도 따뜻하게 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본에서 <사랑의 불시착> 인기가 심상치 않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