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저만치 혼자서』 를 읽고
1.
‘칼의 노래’로 대표되는 김훈 작가를 처음 마주했던 건 학창시절의 어느 날. 교과서 밖의 역사를 마주하는 건 사치이던 시험기간,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친구의 추천에 독서실에서 숨어 읽었던 그 노래는 멜로디도, 가사도 잊혀진 깊은 울림으로만 남아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무너질 수도, 도망칠 수도 없던 영웅의 고뇌가 그저 하루하루만 견뎌내기 벅찼던 수험생에게 어떠한 전율을 줬었던 것이었을까. 십 수년이 지난 지금은 그저 책 위의 가벼운 먼지만 머금은 채 오래된 책장 속에 고스란히 묻혀있을 뿐이지만.
그 후로 한동안 잊고 지냈던 김훈 작가를 다시 마주한 건 강남구 전자도서관에서였다. ‘칼의 노래’ 이후에도 ‘현의 노래’, ‘남한산성’ 같은 굵직굵직한 역사소설을 쓰신 분의 신작이 어느 시대를 다뤘을지 쉽사리 감이 오지 않는 제목을 가져서인지 어떤 책일까 흥미로웠고, 단편집이라는 소개를 보니 어떤 이야기를 풀어냈을지 궁금하여 홀린 듯 읽게 되었다.
2.
‘명태와 고래’에서는 동해안 접경지대에 사는 한 어부의 비극적인 삶을 보여준다. 역사의 풍파 속에서 명태와 고래는 그저 오래 전부터 선조들이 살던 동해를 지켰을 뿐이고 어부는 그러한 명태와 고래를 좇았을 뿐이건만 어부에게 남은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은 것이라 하겠지만.
납북어부의 피해사례는 들어본 듯 하여 찾아보니 작가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얘기라고 한다. 각색된 이야기 속에서도 이리 슬픈데, 오롯이 현실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역사의 피해자들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분명 피해자는 있는데 어디에도 가해자는 없다. 그리고 피해자는 달리 갈 곳도 없다.
문득 최인훈의 ‘광장’이 스쳐 지나간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반세기 전에 남한과 북한이 동등한 선택지였다는 것이, 그리고 이를 선택할 수 없어 ‘제3국가’로 도망쳐야만 하는 상황이 쉽사리 납득되지 않지만, 몇 개의 단어만 바꾸면 오늘 날에도 도처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거대 권력의 횡포가 침해하는 개인의 삶은 ‘정의’를 독점한 그들에 의해 수없이 자행되고, 결국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자신 밖에 없다는 불안한 진실에, 무심코 누리는 오늘의 평화가 괜시리 서글퍼졌다.
‘손’은 특수강간 피해자의 손 모양에 울부짖는 피해자의 아버지와 이를 바라보는 가해자의 어머니 이야기이다. 뉴스에서 강력범죄를 접할 때면 주로 유가족들의 슬픔에 공감하기 마련이다.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거나 알면서도 막지 못한 사고들에 의해 희생되는 피해자들, 그리고 이를 덮은 유가족의 눈물. 남의 불행을 보며 안도하는 것이 못된 버릇임을 알면서도 애써 자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소설에서는 가해자 어머니의 시선을 따라가며, 피해자 유가족에게 댈 수는 없으나 다른 의미에서 고통 받을 수 밖에 없는 가해자의 가족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들에게는 연민이나 동정도 사치라는 것은 누구나 알기에, 비록 내 잘못이 아니더라도 그저 고개 숙일 수 밖에 없는 슬픔은 괜시리 먹먹하게 했다.
‘저녁 내기 장기’는 신혼인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구청에서 둘이 할 수 있는 신고 중 가장 가벼우나 돌이키기엔 너무나도 무거운 ‘혼인신고’. 개인 간의 혼인관계를 법적으로 증빙하는 단순한 신고서 한 장이 누군가에겐 그 어떤 계약서보다 무거이 느껴지리라. 통상 채무나 세금 문제로 ‘법적인 이혼’만 한 부부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대장 내시경 검사’도 앞선 장기 이야기에 이은 황혼 이혼을 주제로 한다. 아직 살 날이 한참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인간관계가 좁아지고 있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학창시절 그 많던 친구들과 연락은커녕 SNS가 아니면 생사도 제대로 알 수 없고, 회사 동료들과는 자의로 타의로 멀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새로운 누군가와 흉금을 터놓는 일은 갈수록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주인공은 대장 내시경 검사의 보호자가 없는 것이 마치 모든 삶의 보호자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꼈을 것이다.
결혼식 때 한 평생 서로만을 바라보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는 부부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을 온전히 지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우리나라의 높은 이혼율이 말해준다. 그리고 내게 남은 건, 내게 남을 건 반려자라는 지고지순한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하였다.
비록 주인공처럼 노량진의 숨 막히는 경쟁과 음험한 분위기를 몸소 겪으며 수험생활을 보내진 않았지만, 구준생의 삶을 그린 ‘영자’ 또한 공무원이라면 쉬이 책장을 넘기기 힘들 이야기이다. 무소속이 주는 결핍감에 세상 누구보다 낮은 존재여야만 하는 수험생의 삶. 그러나 그들에게도 살아내야할 하루가 있고, 그러할 이유가 있다. 감정의 기복을 비롯한 모든 세상사에 초월하고 싶으나 어느 누구도 완전히 초월할 수 없다는 점에서 수험생활은 그 시절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을 주홍글씨와 같다. 물론 주인공처럼 합격한 자는 그 주홍글씨를 자랑스런 문신으로 여기겠지만.
모든 수험시장에는 소수의 승자와 대다수의 패자가 남게 된다. 비단 수험시장뿐 아니라 세상사가 모두 그렇겠지만. 승리도 패배도 영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언제나 또다른 승리와 패배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승패의 문턱에서 허덕이는 과거의 나와 너에게 꼭 전해주고 싶다.
‘저만치 혼자서’는 한평생 신을 모시는 것만을 섭리로 알고 봉사를 업으로 삼던 수녀들의 마지막을 그린 이야기이다. 네 발로 태어나 두 발로 걷다가 세 발로 돌아가는 인간의 숙명.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짧디 짧은 인간의 세상살이는 결국 공수래공수거일 것이다.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려던 수녀들은 결국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야만 간신히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고 불꽃 같던 수녀들은 한 점의 빛이 되었다가 소멸되고 만다.
제우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가 아버지의 성기를 거세하며 모든 것은 소멸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 세상에 선포했던 것처럼, 소멸이라는 것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다. 단지 시간과 방법의 차이일 뿐. 결국 모든 것은 스쳐간다. 지나가 버린 어제와 오지 않을 내일 속에 유일하게 주어진 오늘 하루에 충실한 것만이 스쳐 지나고 나면 무의미한 삶에 작은 의미라도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3.
보통 단편집의 제목이 단편소설에서 따온 경우 해당 제목이 책 전체의 흐름을 대표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 단편집에서도 단편소설인 ‘저만치 혼자서’를 제목으로 따온 것을 보면, 어떠한 환경에서도 결국 혼자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담담하게 그리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저만치 혼자서’도 존재하지 않는 산유화라는 꽃을 기린 김소월의 시에서 따왔다고 한다. 산에는 꽃이 피었다가 진다. 가을 봄 여름 없이 꽃이 피었다가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