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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훈 Sep 27. 2022

우리는 모두가 수상한 사람들

히가시노 게이고의 '수상한 사람들'을 읽고

1.


쉽게 읽히는 글을 좋아한다. 사실은 쉽게 읽히는 글만 좋아한다.

연구서적이나 실용서적은 독자의 '공감'을 얻는 것보다는 지식의 '전달'을 중요시하기에 쉽게 읽힐 수 없는 것이 태생적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작가라면 모름지기 읽히기 위한 글을 쓰는 바, 독자가 글을 읽음으로써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써야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쉽게 읽힐 수 있는 글'을 써야한다고 생각한다.


퀸도 얘기하지 않았던가

Because I'm easy come, easy go

A little high, little low


Easy reading의 대명사. 분명 그의 많은 책을 읽었지만 어떤 책의 첫 장을 펼쳐도 초면인 것 처럼 또 홀리고 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수상한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다.


2.


  '자고 있던 여자'

  본의 아니게 자신의 방을 동료들에게 에어비앤비로 돌리고, 본인은 차 안에서 새우잠을 청하는 불우한 주인공의 일상. 아무리 돈 받고 빌려주는 방이라지만 주인공도 모르는 여자만 떡하니 들어와 자고 있는 상황이라니, 사건의 진상과 관계없이 안쓰럽기가 이루 말할 데 없다. 회사 동료들도, 집주인도 모르는 여자가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분명 수상한 '사건'에 연루된 것은 분명하나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는다. 

  사건은 어처구니 없이 소확횡을 노리던 여직원의 장난질에 기인한 것. 느닷없이 예쁜 여자가 등장하면 언제나 긴장해야 된다. 소설에서든. Social에서든.


  '판정 콜을 다시 한번!'

  인생은 Birth와 Death 사이의 Choice라고 했던가. 순간의 잘못된 선택 - 혹은 왜곡된 기억 - 으로 삶의 궤적이 바뀌곤 한다. 아니 바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니까.

  보편적으로 독자들이 희망하고 그리는 해피엔딩의 이야기에서는 잘못된 선택에도 불구하고 다시 정상궤도로 돌아오는 - 마치 슬램덩크의 정대만과 같은 - 부메랑이 그려지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 그리고 현실을 반영한 이 소설은 -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주인공은 고시엔 진출을 앞둔 마지막 경기에서 본인의 잘못된 선택 그리고 이에 기인한 왜곡된 기억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궤도를 이탈하고 뒤를 돌아볼 생각을 않는다. 매순간 주어지는 선택의 기로에서 잘못된 선택은 돌아오지 못할 낭떠러지라고 느껴지지만, 그저 하나의 갈림길일 뿐이다. 멀리서나마 판정 콜을 다시 불러주고 싶다. 아니면 F5라도.


  '죽으면 일도 못해'

  근래 읽은 이야기 중 이만큼이나 역설적인 제목을 가진 작품이 있었던가. 죽으면 일도 못해라니. 죽으면 영원히 잘 수 있다는 우스개만큼이나 잔혹한 역설이다. 

  우리나라는 전세계에서 두번째 가라면 서러운 과다근로국가이다. 근로자의 인권이 존중 받는 선진국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과로로 인한 사건, 사고들이 하루를 멀다하고 뉴스를 통해 들려온다. 들리지 않는 소식들까지 포함된다면 얼마나 많은 근로자들이 쓰러지고 있을까.  쓰러지면서까지 숨기려했던 건이 고작 근무시간외 근로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물론 그렇다고해도 소설에서의 갑질이 정당화되서는 안되겠지만. 죽으면 일도 못해서 정말 일을 못하게 된 작품 속 과장의 명복을 빌 뿐이다.


  '달콤해야 하는데'

  '화양연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일컫는다. 지고나서야 꽃인 줄 알기에 아름다운 시기는 언제, 어떻게 깨어질지 모른다. 마치 시작도 끝도 없는 달콤한 꿈처럼.

  주인공의 꿈 같던 시기는 2번의 사고로 어이없이 무너진다. 그리고 그 사고를 잊기 위하여 믿고 만다. 누군가에게 잘못을 돌려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는 '믿고 싶은' 진실을.

  보통 '믿고 싶은' 진실은 '믿어야 하는' 진실과 괴리가 있기 마련이다. 믿어야 하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수 있을 때만이 진정 아름다운 시기를 추억할 수 있지 않을까.


  '등대에서'

  무심코 읽던 책이나 보던 영화에서 접한 이야기에 스스로 반성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수리남에서 구구단을 못 외는 친구를 무시하던 하정우씨, 항상 주인공을 한 수 아래로 생각하던 이번 작품의 주인공의 친구를 볼 때도 그러했다.

  물론 두 이야기에서 시련의 제공자는 다르지만, 결국 이겨내야하는 건 리쌍처럼 겸손을 힘들어하던 자신이다. 웃음을 빙자해 주변을 희롱의 대상으로 삼곤 했던 - 그러다 호된 시련에 시달릴 수도 있었던 - 스스로를 돌아보련다.


  '결혼 보고'

  이번 단편선에서 결말을 추리하기 가장 어려웠던 작품이었다. 내 친구의 이름을 빙자한 다른 사람의 사진이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성형을 한 것인가 아니면 '화차'처럼 남의 인생을 훔쳐사는 사람이 쓴 건가?

  몇 번의 고개를 넘고 넘어 편지를 쓴 사람도 이유도 드러난다. 행방을 알 수 없는 친구의 뒤를 좇는 모습은 강력범죄가 연관되지 않을 수 없다는 인상을 풍기지만, 그 모습도 마치 결혼식장에 들어가기 전까진 들어간 게 아니다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 세상사가 모두 그렇듯 들어간다고 끝난 것도 아니지만.

  물론 이미 식장에 입장했던 입장으로서는 전자의 입장을 적극 견지하는 바이다.


  '코스타리카의 비는 차갑다'

  낯선 여행지에서는 아무런 위험이 없는 경우에도 쉽사리 긴장을 풀기 힘들다. 치안 수준이 높은 나라인 경우에도 외국인이 얼마나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을지 걱정되는 판에, 하물며 치안 수준이 낮은 나라에서야…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베트남 다낭의 한강에서 친구랑 둘이 맥주캔을 기울이다가 다가오는 불길한 기운을 느낀 적이 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난 누나(정황상 사실은 형)는 깜박이도 안 켜고 호객을 하기 시작했고, 괜스레 겁에 질려 연신 노땡큐를 연발. 잠시 후, 비는 그치고, 오토바이는 사라지고, 테이블 위에 내 지갑도 사라졌다. 그래도 의리 있는 형들이 달러만 가져가고 지갑은 인근 잔디에 버려두어 얼마나 고맙던지!

  여행은 돌아오기 위함이라고 했던가. 모든 여행자들이 걱정 없이 여행다닐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이뷔코스의 두루미와 함께 그려본다.


3.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작품을 접할 때 그랬던 것처럼 홀린듯 접하여 홀린듯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1년에 여러 편을 쓸 정도로 다작을 하는 게이고가 했던 인터뷰가 떠오른다. 


Q. 어떻게 그런 많은 이야기를 뿜어내시는지?

A. 1. 매일 같은 시간에 책상에 앉는다.

    2. 글을 쓴다


1.2를 매일 반복한다.


지극히 단순하고도 자명한 진리다. 

게이고처럼 다작하진 못할 지언정 다독하는 가을이 되어야겠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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