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_머니볼
MBTI가 유행이다. 세상 사람들을 16가지 유형으로 헤쳐모여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단견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의 유형을 따라 나무위키를 읽으며 스크롤을 내리다보면 어느새 'INFJ 소모임'에 가입까지 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니 묘한 안정감까지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같은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지. 같은 유형이라면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을까? 성격 유형과는 전혀 상관 없는 걸까?
나는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철학과, 태도와 스타일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철학이 삶을 대하는 관점, 즉 생각의 출발점이라면 태도는 그 철학을 몸소 실천하는 행동, 스타일은 철학과 태도가 하나의 개성있는 멋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데코레이션이다. 철학, 태도, 스타일의 종류는 사람 수만큼 많을 텐데 그 조합은 어떻겠는가. 결국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MBTI의 결과와 연관지을 수 있는 종류의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결론.
이 말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손에 꼽을 정도로 단순한 사회는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문제는 지금 우리의 사회는 MBTI처럼 16개로 삶의 방식이 재단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
취업준비를 하다보면 인적성 검사라는 MBTI 상위 호환 버전 검사를 하게 되는데 나는 이 검사를 하는 게 매우 신선한 경험이었다. 공짜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나는 생각보다 보수적이고 계획적이고 쪠쩨하고 남들의 시선을 매우 신경쓰고 공상을 즐기며 그렇다고 좋은 아이디어를 현실로 실현시키는 도전은 하지 못하는 소심바리라는 사실을 검사를 하다보면 알게 된다. 그래서 검사를 하면 내 입모양은 자연스레 '오...'모양을 하게 되고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선택하게 만드는 예스or노 질문에 감탄하기도 한다. 아니 이런 엠비티아이 유사과학으로 사람을 뽑는다고? 이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돌아서게 만드는 질문 테크트리다.
그리고 모든 검사 시작 전 이런 유의사항이 있다. '솔직하게 답하시오'. 질문들은 교묘하게 단어만 바꾸어 이 사람이 검사를 솔직하게 진행하고 있는지 확인한다. 취준생 사이에서는 페르소나를 뒤집어쓰고 끝까지 정신줄을 잡고 연기하라는 연기파와 그냥 생각나는 대로 솔직하게 답하라는 솔직파로 의견이 나뉘는데 나는 후자였다. 솔직하게 200여개의 질문들에 답을 진행하면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 머릿속에 강렬히 남게 된다. 검사 후 꺼진 모니터 앞에서 나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다 취준생의 정체성을 찾게 해주는 우리 기업들의 노고에 감사, 감동, 동시에 묘한 씁쓸함이 느껴진다. 왜냐하면 인성검사의 근본 목적은 말 그대로 '검사'. 당신이 우리랑 맞는지 안 맞는지 확인좀 해봅시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입사하고 싶으면 회사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당신이 어떤 정체성을 가진지는 관심없소, 우리 마음에 드는게 중요하니까! 이 말을 생각할때면 한때 예능에서 많이 보였던 게임 하나가 떠오른다. 특정 자세의 사람 모양 구멍이 뚫린 스티로폼이 천천히 다가온다(인성검사). 제한된 시간 내에 출연자는 그 자세를 취해 구멍을 통과해야 한다(우리가 원하는 자세 취해라). 그러지 않으면 스티로폼이 뒤에 있는 물로 밀어넣어버리니까(탈락!). 지금은 출연자들이 물에 빠지기만을 기도하고 빠졌을 때 한껏 웃어댔던 그때 나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웃프다. 지금은 자세를 제대로 취하지 못해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물에 빠져서 내가 취했던 자세를 곰곰히 생각해본다. 솔직하게 답했던 나의 모습을 복기해보며 나의 진짜 모습과 만날 수 있다는 소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적성시험, 면접에서 탈락할때마다 스스로를 자책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사회를 뭘로보고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너 자신을 너무 드러낸 건 아닌지, 취하라는 자세를 제때 취하지 않은 게 아직도 철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인지... 잘못과 책임을 나에게 돌리는 시간이 길어져 짐짓 우울해질 때면 이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 위로가 된다.
(영화 '머니볼'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년 꼴지 팀 오클랜드 애슬래틱스의 단장 빌리 빈(브래드 피트)은 전통적인 야구선수 스카우트 방식에서 벗어나 숫자와 통계에 기반한 과학적 관리기법(머니볼 이론)을 도입한다. 팀내 기존 야구 어르신들은 당연히 반발한다. 이 장면은 그 어르신들이 펄쩍 뛸만한 결정을 머니볼 이론에 따라 실행하고 불안에 떠는 그의 조수 피터 브랜드(조나 힐)에게 말을 건네는 장면이다. 그 전에 그가 한 말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는 이 방법을 믿느냐야.
그리고 피터 브랜드(조나 힐)은 대답한다.
난 믿어요.
그리고 몇초의 정적 뒤 빌리 빈(브래드 피트)은 이야기 한다.
우리의 방식을 굳이 남에게 설명하려고 하지마.
이 영화는 머니볼 이론을 집중 탐구하는 영화도 아니고 머니볼 이론이 혁신적이기 때문에 이 이론을 적용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머니볼 이론을 자신의 방식으로 '선택'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른 것들을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전두엽은 시뮬레이션 기능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자신이 가지 않은 길을 갔더라면 어떤 일이 펼쳐질지 상상해보는 기능도 수행한다. 그리고 시뮬레이션 결과로 이어지는 감정이 바로 '후회'다. 다른 선택지를 상상하는 일은 종종 달콤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두엽 기능이 망가졌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게 된다. 그리고 후회하는 인간은 흔들리기 마련이다.
빌리 빈은 머니볼 이론을 선택했다. 다른 방식을 선택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이 질문은 빌리 빈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실제로 후회와 미련이 섞인 고뇌는 클로즈업 된 그의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영화는 한 가지 방식을 선택했기에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해야 하는 남자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방식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 조금은 양보하고 타협해도 되는 트레이드 기회가 주어졌을 때 오히려 더욱 몰아붙이며 저렇게 이야기한다. 돌아올 진지를 태우는 이순신처럼, 배수진을 치듯이. '굳이' 설명하려고 하지마. 이는 빌리 빈이 스스로에게 던진 선언과 같다.
삶이 하나의 스포츠라면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철학, 태도, 스타일 그 외에 뭐가 되었든 우리만의 방식은 다른 방식의 포기를 의미한다. 우리는 종종 삶의 방식을 조롱받기도 하고 강요받기도 한다. 내가 선택한 방식이 현명하지 못한 것인가 자책할 때도 있다. 생각과 고민이 많아질 때 빌리 빈은 명쾌하게 요점을 정리해준다. '당신은 요점을 놓치고 있다. 중요한 건 당신이 그 방법을 믿고 있는가이다. 믿고 있는가?"
이 질문에만 답해본다면 세상에 나를 맞춰야 하는지, 기업의 인재상에 나를 맞추는게 맞는지, 가족 친구 연인에게 나를 맞추는게 맞는지 고민하는 우리가 조금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방식이 옳다고 믿는가? 긴가민가하다면, 의심이 든다면 나만의 다른 방식을 찾아 노력하고 개선하면 된다. 옳다고 믿는가? 그럼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 방식을 타인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당하게 내 갈 길 가면 된다. 내 갈 길 가서 20연승으로 팀을 이끈 빌리 빈처럼. 혹여나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을까 노파심에 빌리 빈은 저 말 뒤에 다음과 같은 말로 깔끔하게 망치질한다.
"Don't. To anyone."(하지마, 아무한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