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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담 Feb 09. 2024

초등학생은 글씨를 잘 써야 합니까?

웩슬러 검사는 판독하는 기간이 일주일 정도 걸린다. 결과를 들으러 센터에 가기 전에 몇 가지 질문사항을 정리해뒀다. 무언가 특출나게 잘하거나 특별히 뒤떨어지는 부분 없이 무난한 아이라 크게 물어볼 것은 없었지만 ‘그림’, '글씨'에 관한 내용을 물어보기로 마음먹고 센터로 향했다.


평소 차분하고 꼼꼼한 성격인 아이이건만 어째서인지 종이 앞에서는 그 기질이 잘 발현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맘때 여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색칠공부도 설렁설렁, 색을 칠하는데 있어서 빈 틈이 대부분이고 그마저도 선을 다 삐져나와서 거의 미완의 상태로 버 리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글씨도 마찬가지였다. 왼손잡이이기도 하고 글씨의 선 이 중구난방인데다 크기도 너무 커서 초등학교 가면 글씨 쓸 일이 많을텐데 어쩌나 싶어 슬그머니 걱정이 올라왔다.

다시 찾아간 센터에서 전반적인 웩슬러 검사 결과를 듣고 나서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이야기 해보라기에 이런 이야기를 말씀 드렸다.

내 말이 가만히 듣던 선생님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셨 는데 그 부분에서 나는 벌써 느껴버렸다. ';내가 뭔가 잘못 짚고 있구나'하는 직감이 든 것이다.

선생님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물었다.


"글씨를 꼭 잘 써야 하나요? 왜요?"

"글씨를 잘 쓰는 아이가 공부를 잘 한다고들.... 이 말은 내뱉고도 너무 창피했다.

아이가 글씨를 왜 잘 써야 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 던 것이다.


막연히 글씨는 또박또박 잘 써야 하는 것이라고 인식 하고 있었는데 본질적인 질문이 훅 들어오니 말문이 턱 막혔다.

"글씨를 잘 쓰는 아이가 공부를 잘 한다는 건 너무 이 분법적인 생각 아닐까요? 실제로 천재들 중에는 악필도 많다는 이야기 들어보신 적 있죠?“

선생님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애써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이는 수밖에...


"우리 아이가 제가 보기엔 차분하고 성실해서 글씨를 잘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연습이 부족해서 그런가 싶어 서요..

"아이가 글씨를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건 어머님의 시선이죠?"

2연타였다.

아이가 글씨를 잘 쓸 수 있을만한 아이라는 것 역시 나 의 프레임이었던 것이다. 나의 일방적인 시선으로 아 이를 재단하고, '글씨를 잘 쓰는 아이'라는 프레임에 가 두려 했던 것이로구나. 깨달아졌다.

내 멋대로 아이를 단정짓지 않겠다고 다짐해놓고도 이 렇게 또 모자라 모스이 나오고야 말아다


내 멋대로 아이를 단정짓지 않겠다고 다짐해놓고도 이 렇게 또 모자란 모습이 나오고야 말았다.

예비 초등학생이라는 생각에 너무 치중했던 탓일까.

만 6세까지 한글 공부도 따로 안 시키고, 쓰기 공부도 시키지 않아 혹여나 뒤처질까 조바심이 났나보다.


선생님은 지금 연령에 글씨를 삐뚤빼뚤 쓰는 것은 당 연한 것이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좋아질 것 이니 억지로 연습시키거나 다그치지 말고 기다려주라 고 이야기해주셨다.


‘극성 떨지 말자.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느리게 가도 괜 찮다고, 더 멀리, 더 오래 가면 되는거니까... ‘라고 생각 하면서도 현실 앞에서는 이렇게 다른 아이보다 뒤처질 까 걱정하게 되는게 엄마의 마음인가보다.


웩슬러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갔다가 나의 바닥만 내보 이고 온듯한 느낌이 들어 조금은 민망해졌다.

나의 부족한 점을 발견했으니 또 반성하고, 고치고, 더 많이 사랑해주면 된다.

나의 바닥을 들키는 일은 매번 민망하고 부끄럽지만 그래도 괜찮다.

먼지 털듯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앞으로 걸어가면 되 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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