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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센 여름이 없는 것처럼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작가의 그 문장

메마른 땅과 뜨거운 햇볕은 여름 과일들의 고난이 아니다. 어디로 피서를 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온 여름이 다 지나갔다. 축복은 저 숨 막히는 무더위 속에 있었던 것임을 여름의 끝물에 한 입의 과일을 깨물면서 문득 알게 된다. 이 많은 과일들을 지상에 차려놓고, 힘센 여름은 이제 물러가고 있다.

-김훈,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여름 풍경 1 

내가 사는 아파트는 현관의 경비실을 통과해야 드나들 수 있는 옛날 아파트다.  경비아저씨는 우리 집에 모르는 사람이 다녀갔는지, 택배를 안 찾아갔는지, 아이가 며칠 안 보이면 어디 갔는지 물을 정도로 이곳에는 아날로그 정서가 남아있다. 무더운 여름날, 잠깐 물건을 사들고 오는데도 땀이 줄줄 흐르는데 경비실 창문이 열려 있다. 창문으로 더운 바람이 많이 들어갈 텐데 싶어 조심스럽게 에어컨이 작동되는지 물었다. 작은 에어컨이 한 대 있지만 구식이라 틀어놓으면 더운 바람이 돌아 식사 때만 튼다고 하는 말에 순간 멈칫해진다. 이 더운 여름을 이 정도로 힘겹게 보내고 계셨다니. 몰랐던 일이다. 엄마는 없는 사람들에겐 여름 나기가 겨울보다 낫다고 했지만 옛말이지 싶다. 요즘 같은 여름 더위는 기후 재난 수준이라 에어컨 없이 사람의 몸만으로 여름을 나기엔 힘겨운 '힘센 여름'이 되고 있으니까.



# 여름 풍경 2

또 다른 여름 풍경. 아주 오래전 대선 캠프의 TV토론 방송팀에서 일할 때다. 프로그램에 따라 상위 1%부터 하위 1%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왔는데 이 프로그램은 살면서 가장 많은 국회의원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난 시간이었다. 삐질삐질 땀을 흘리면서 여의도를 오가던 여름날, 내가 만나는 국회의원들은 긴 팔 와이셔츠 단추를 목까지 채우고 거기에 긴 팔 정장까지 차려입고 다녔다. 처음엔 모두 '계절'을 타지 않는 멋쟁이들인가? 생각했는데 가까이 지켜보니 좀 달랐다. 그들은 뜨거운 땡볕을 만날 일도, 무더운 거리를 걸어 다닐 일도 좀처럼 없고 어딜 가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도어 투 도어로 상시 대기 중인 운전기사 분들이 있었다. 더운 여름이 와도 아예 여름이 없는 것처럼.


며칠 전, 오랜만에  TV 뉴스를 보면서 속 시끄럽고 복잡한 뉴스의 내용보다 정치인들의 옷차림에 눈길이 갔다. 이 무더운 여름날에도 긴팔 셔츠를 목까지 채워 넥타이를 매고 긴팔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화면에 한가득이다. 그 옛날 프로그램에서 내가 만났던 국회의원들처럼. 그들의 여름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나의 여름과 그들의 여름은 같지 않구나.  '힘센 여름'마저 평범한 사람들처럼 느낄 수 없다면 과연 어떤 경험과 감정을 같이 나누고 느낄 수 있을까.



# 겨울 풍경 1

눈이 많이 내리던 날의 출근길. 출근을 하면서 걱정한다. 혹시 눈에 미끄러지지나 않을까. 하지만 방송국 앞에서 나의 걱정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만다. 이른 새벽 누군가 잠도 못 자고 눈을 깨끗하게 쓸어놓은 것인지... 출발할 때 보았던 눈은 이곳에 없다. 마치 눈이란 원래 없던 나라인 것처럼 하루가 시작된다. 저녁 무렵이면, 원래 눈이 안 왔던 날이었던 것처럼 착각하며 퇴근을 한다.



# 겨울 풍경 2 

집으로 가는 퇴근길. 분명 방송국 앞 거리에는 눈이 없었는데 우리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면 다른 세상이다. 아파트 단지와 경계가 애매해 아무도 쓸지 않은 이상야릇한 구역에는 녹지 않은 눈이 남아있다. 아마도 녹지 않는 눈은 한동안 빙판길을 이루게 되리라.  방송국 앞은 함박눈이 내려도 '눈 없는 나라'가 되지만 우리 동네 거리는 살짝만 눈이 내려도 '얼음왕국'이 되는 순간이다.




더운 여름이 와도 여름이 없는 것처럼,  추운 겨울날 눈이 내려도 눈이 안 온 것 같은 세상이 있다. 때론 내가 사는 세상일 수도 있고 때론 저 너머의 세상일지는 몰라도. 김훈 작가의 말처럼 '힘센 여름'을 통과하며 생각해본다. 힘센 여름이 와도, 힘센 겨울도 와도 원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 그것은  어쩌면 이상한 일일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그곳엔 사람이 있으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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