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로자 Feb 12. 2022

여행, 의외의 순간 - 캐나다 숙소 뒷마당의 오로라

락펠러 센터에서 본 뉴욕의 야경, 포르투의 와이너리 투어, 몽골에서 별을 보며 마신 보드카처럼 

오래 기억 나고 누가 들어도 황홀할 법한 여행의 순간들이 있다.


모든게 다 계획대로 잘 되었다. 

예정했던 시간에 뉴욕 야경을 봤고 예약 후 들른 와이너리에서 투어를 했으며 가이드와 함께 안전한 몽골 여행을 하며 별을 봤다.


하지만 가장 기억나는 순간은 '의외의 순간'이다. 예정하지도 예측하지도 않았던.


2016년 가을에 오로라를 보겠다는 목표 하나로 친구랑 캐나다에 갔다.


일정 중 3박을 옐로나이프로 잡았고(옐로나이프는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도시로, 오로라를 관측할 확률이 전세계에서 손에 꼽게 높다)

이틀째와 삼일째는 오로라 헌팅 투어와 티피 투어를 각각 예약했다.


오로라 헌팅 투어는, 승합차에 예약한 인원들이 함께 탑승하여

가이드가 오로라가 발생할 것으로 예측하는 지점들에 데려다 주는, 그야 말로 오로라를 '헌팅'하는 투어다.


가도가도 까만 하늘, 별조차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중간중간 내려가며 혹시나 보일까 싶은 오로라를 눈이 빠져라 찾았지만, 오로라의 ㅇ도 안보였다.


'아 돈 날렸네'


다음날은 티피 투어가 예정되어 있었다. 

티피 투어란, 오로라가 잘 관측되는 지점에 마련된 티피 캠프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오로라를 관측하는 투어다. 이곳에 마련된 캠프가 '티피'라는 원주민들의 주거 형태를 본따서 '티피 투어'라 부른다.


투어를 가기 전에 전의를 다지며, 제대로 된 식당이 별로 없는 옐로나이프에서 가장 비싼 호텔 레스토랑을 찾아 밥을 먹었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고 오로라를 관측하는 사이트에 접속,

오늘은 꼭 볼 수 있길 바랬지만 그는 아니라 말하고 있었다. 


말이 심하군


그리고 기술은 틀리지 않았다.

그날도 오로라는 보지 못했다.

오로라를 찍으려고 배워온 사진 기술로 하릴없이 인스타용 사진만 열심히 찍어대며

그 날의 오로라 투어도, 돈도 모두 증발했다.



돈을 주고 예약한 2개의 오로라 투어는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성공의 순간은 있었다. 


옐로나이프에 도착한 첫 날은, 택시만 겨우 다닐 정도의 늦은 밤이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 타고, 예약한 숙소에 갔다.

운이 좋으면 숙소 뒷마당에서 오로라를 볼 수도 있는 곳이라고 했지만,

사실 조식으로 나오는 에그베네딕트가 엄청나다고 해서 예약한 곳이었다.


느즈막히 도착한 우리를 할아버지인 주인장이 반겨주셨다.

손녀딸들이 늦게 도착해서 안쓰러운 마냥 이것저것 물어봐주었고,

배고프다는 말에 근처에 슈퍼가 없다며 미안해했다.

괜찮다고 하곤 방에 짐을 푸는데, 

전에 한국인 숙박객들이 두고 갔다며 비빔면을 건네주셨고 따뜻하게 끓여 먹으라고 하셨다

비빔면을 후후 불어 먹으면서 할아버지의 애정을 느꼈다.


따뜻한 짜파게티, 그리고 따뜻한 비빔면의 추억


이대로 자긴 아쉬워서, 숙소 뒷마당을 구경할까 싶었고

마침 한 여성분이 혼자 카메라를 설치하고 추운 날씨를 견디며 계셨다.


"Hello?"

"한국인이세요?"


헬로우, 3음절로 한국인임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같은 한국인인 여성분과 깔깔대며 인사를 나눴다.


그 분과 나란히 카메라를 뒷마당 베란다에 설치하고

캐나다랑 한국 이야기를 시시콜콜히 건내며 하늘을 봤다.


보이는 별만으로도 좋았던 밤


오로라를 봐도 그만 안봐도 그만인 날이었다.

오로라를 보기 위한 돈을 따로 낸 것도 아니었고, 그냥 잘까 하다가 나온 뒷마당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뒤에 이틀 모두 많은 돈을 써가며 오로라 투어도 예정했으니까..!

한국인을 만나서 수다를 떠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밌고 만족스러운 밤이었다.


저거 오로라 아니에요?


옅은 초록색이 저 멀리서 가루처럼 뿌려지더니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오로라에 저게 오로라인건지 아니면 졸려서 하늘이 초록색으로 보이는 건지

알쏭달쏭해 했다.


오로라를 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오로라는 가루로 된 파도같다.

파도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고, 셔터를 누르곤 숨도 멈춰가며 하늘을 하염없이 봤다.

초록색 파도는 계속 밀려왔고 흩어졌다 뭉쳤다 하며 머리 위를 느린듯 빠르게 지나쳐갔다.



오로라를 보다니.

그것도 숙소 뒷마당에서 보다니.


옐로나이프에 온 첫 날, 

이 날의 오로라 덕분에 오로라 헌팅 투어와 티피 투어가 실패했어도

내게 옐로나이프는 성공적인 오로라 여행이었다.


'어쨌든 봤다', 가 아니라 '그 곳에서 봤다'.


<여행의 이유>를 쓴 김영하 작가가 '여행은 길을 잃어야 한다'라는 말을 한 적 있다.

길을 잃어서 발견한 의외의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된다는 말.

예상 가능하고 예정했던 순간 보다 의외의 순간이 더 여행답다는 것이다.


예정했고 예상했던 투어들이 아닌

기대없던 의외의 순간인 숙소 뒷마당에서 오로라를 본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여행다운 여행의 순간이 되었다.


다음에 여행을 갈 때에도 예정하지 않아 길을 잃을 순간을 마련해주어야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