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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형박사 Aug 07. 2019

바람처럼 살다가는 마사이족

동아일보 칼럼 연재 2002.01.09 기재

『다음 칼럼은 90년대~ 00년대 이시형 박사가 젊은이들에게 보냈던 이야기입니다. 약 20년의 시간이 지나고, 그때의 젊은이들은 4-50대의 중년이 되었고, 이제 다시 새로운 20대의 젊은이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 나가려고 합니다.  지난 이야기를 읽으며, 그때에 비해 지금은 우리 사회는 얼마나 발전했는지, 어떠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는지,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


아프리카의 세렌게티는 이름 그대로 ‘끝없는 대지’다. 아득한 지평선을 향해 달리는 사파리는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겐 대단한 감동이다. 영양 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온갖 짐승들이 무리를 지어 뛰어노는, 참으로 평화로운 들판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맹수가 나타나면 온 들판이 아연 긴장상태에 들어가고 쫓고 쫓기는 치열한 생존 경쟁이 전개된다. TV ‘동물의 왕국’에서 흔히 보게 되는 낯익은 장면들이 눈앞에서 벌어진다.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약육강식의 냉엄한 생존의 법칙을 실감케 한다. 여기는 동물원이 아니다. 야생 그대로다. 정말이지 박진감이 넘친다. 한데 궁금증이 생긴다. 아무리 아프리카 오지라지만 이 개명 천지에 어떻게 저런 태곳적 원시의 자연이 그대로 보존될 수 있을까.  우린 여기서 마사이족의 우주관을 상기하게 된다. 아프리카 영화에서 보게 되는 훤칠한 키에 붉은색 옷을 걸친 부족이다. 얼굴엔 얼룩무늬, 귀엔 큰 구멍, 춤을 출 적엔 막대기를 들고 그냥 선 채 위로 껑충껑충 뛰기만 하는 독특한 춤을 기억할 것이다.


▼삶의 흔적 남기지 않아▼ 탄자니아, 케냐의 드넓은 대지의 주인인 이들은 수천 년을 맹수와 함께 평화롭게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이곳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쫓겨나야 했다. 꼭 40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곳에 사람이 산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완벽한 자연 그대로다. 이곳에 사람이 수천 년을 살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들판이야 풀이 자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바위라는 뜻의 이 곳 ‘모루’ 지역은 자그마한 언덕에 아름다운 바위, 나무, 그리고 이웃에 물이 있어 큰 부락을 이루어 살았다고 한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작은 돌 언덕이 여기저기 흩어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누군가의 입에서 창조주의 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맹수가 우글거리는 대평원에 이렇게 아름다운 언덕이라니, 신이 이룬 절묘한 조화 앞에 할 말을 잃게 된다. 우리가 정말 놀란 건 그 아름다운 바위 어느 곳에도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없다는 점이다. 길을 내고 바위를 옮기거나 표면에 부처님도 새기고, 그 잘난 이름하며, 낙서인들 왜 없으려고. 개발이란 이름으로 택지를 조성하거나 포장도 하고…. 콘크리트 옹벽이 흉물스럽게 남아 있을 텐데. 그러나 완벽한 자연 그대로의 보존, 이건 정말이지 우리 상식으로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것이 마사이족의 자연관이요, 우주관이다. 자기 자신도 자연의 하나로, 자연 속의 한 구성원으로 의식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오만이 없다. 그들의 먹이는 거의 소에 의존하고 있다. 우유, 피를 마시고 소똥으로 집을 짓고 연료로 쓰고, 가죽으로 샌들을 만들고, 먹고 남은 뼈는 나무에 얹어 영혼이 하늘로 가기를 빈다. 죽고 살고, 피고 지는 자연의 생멸 순환의 법칙에 따라 살아간다.  


▼우린 무엇을 남길 것인가▼ 이런 생활 의식은 요즈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깨막대 하나에 양손을 걸치고 메마른 대지를 소처럼 느릿느릿 걷는 마사이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어디로 가는 걸까. 가고 있는 쪽엔 아득한 지평선, 메마른 대지, 집도 소도 보이지 않는다. 물통도 도시락도 손에 든 거라곤 없다. 그냥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기 위해 걷는 사람 같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마치 구도자처럼, 공수래공수거. 오직 막대기 하나에 모든 걸 의지한 채 맹수가 우글거리는 그 대지를 겁도 없이 가고 있는 것이다. 마사이족에게는 뭔가를 모아 부자가 된다는 개념이 없다. 그들은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 느린 걸음으로 시간을 만들어 쓰고 있다. 땅에 대한 미련도 없다. 물 좋고 풀 좋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고향이 없으니 지역감정도 있을 턱이 없다. 바람처럼 잠시 머물다 지나가면 그뿐, 마사이는 발자국도 남기지 않는다. 그들이 남긴 건 아무것도 없다. 아! 하지만 여기를 보라. 얼마나 위대한 걸 남겼던가. 지구 상 오직 한 군데, 사람이 살다 갔으면서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는 곳. 야성과 원시의 자연 그대로, 그것이 오늘날 온 인류에게 얼마나 큰 위안과 휴식을 주고 있는가. 이보다 더 위대한 유산이 또 있을까. 

우린 무엇을 남길 것인가. 마사이족의 위대한 유산 앞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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