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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형박사 Dec 18. 2019

타슈켄트의 천사들

동아일보 칼럼 연재 2002.03.06 기재

『다음 칼럼은 90년대~ 00년대 이시형 박사가 젊은이들에게 보냈던 이야기입니다. 약 20년의 시간이 지나고, 그때의 젊은이들은 4-50대의 중년이 되었고, 이제 다시 새로운 20대의 젊은이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 나가려고 합니다.  지난 이야기를 읽으며, 그때에 비해 지금은 우리 사회는 얼마나 발전했는지, 어떠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는지,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


여기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밖엔 이미 어둠이 깔리고 있지만, 이곳 아시아개발원(IACD)의 작은 빌딩엔 환하게 불이 켜져 있다. 여기가 한국인들의 거점이다.

이제 막 아프가니스탄에서 의료봉사를 마치고 온 젊은 여의사, 그의 옷에선 아직도 포연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다. 아프간 사태에 마음이 아팠던 그는 서울에서 달려 왔다고 한다. 피로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가야 한다는 그의 눈엔 사랑보다 진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자원봉사 의료진 맹활약▼

2층에 올라가니 한국의 부천에서 온 정 박사가 오늘 열네 번째 백내장 수술을 마치고 잠시 쉬는 중이다. 대기 중인 환자들을 보니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벌써 몇해 째다. 이번엔 15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왔다. 수술 장비부터 비품까지 비용만도 엄청나다. 그걸 개인 병원에서 부담하기란 웬만한 결심 아니고는 될 일이 아니다. 우리의 각박한 의료 풍토에서는….

옆방은 치과 클리닉이다. 젊은 부부 치과의사가 5년째 신혼 여행 중이라고 밝게 웃었다. 그리고 내과 외과 등이 있어 준종합병원 규모다. 미국에서 온 교포 의사와 간호사, 약사, 의료기사 등 젊은 그들의 가슴엔 온통 사랑이 넘쳐 나고 있었다. 첨단장비와 최신 의술로 정성을 다 하고 있다. 그건 한국의 명예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타슈켄트 의과대학은 100년의 전통을 자랑하고 학생 수만도 3000명이다. 구 소련에서 교육받은 엘리트 교수진은 자부심도 대단하다.

하지만 독립된 지 10년, 아직도 모든 게 과도기 상태라 사회 각 분야에서 진통과 시련을 겪고 있는 듯했다. 그곳 의과대학 총장이 자매 결연한 서울의 삼성서울병원을 둘러보고 난 후, “난 거기서 21세기를 보았다”고 한 짧은 소감은 참으로 많은 걸 시사해 준다.

그날도 최첨단 지견을 나누기 위해 타슈켄트 의대 강당에는 한국의 중진 치의학 교수 세 분의 특별강연이 열리고 있었다. 현지 의사, 교수, 의대생들로 발디딜 틈조차 없었다. 나도 한마디 할 기회가 있어 강단에 서 보니 한국 의학에 대한 뜨거운 열기와 기대를 느낄 수 있었다.

이 곳에서의 한국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다. 수적으로는 적지만 고려인의 근면성과 성실함은 그곳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교통신호를 위반해도 법칙금이 2배다. 오해하지 마라. 차별이 아니다. 존경의 표시다. “당신은 고려인 아닌가”라고 경찰이 반문한다. 그만큼 일등 시민으로 믿고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 뿐인가. 세계 어디를 가도 외국차라면 길에서 일제차가 가장 많이 눈에 띈다. 하지만 여기서만은 사정이 다르다. 전자제품과 함께 한국차의 우수성에 감탄을 한다. 거기다 이들 자원봉사자의 헌신적인 노력이 그곳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준 것이다.

“봉사라니요? 저희는 여기가 좋아 순박한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게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아, 이 각박한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다. 이름없이, 소리없이 사랑을 베풀고 있는 이들의 맑은 영혼 앞에 난 그저 부끄럽고 할 말이 없었다.

넉넉지 않은 살림을 오직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끌고 가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도 한국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손길들이 있어 이나마 꾸려 갈 수 있는 게 고맙다고 손을 모은다.

얼마 전 터진 아프간 사태로 그 나마 바쁜 일손이 더 분주해졌다. 살림살이도 더 벅차게 되었다.


▼´고려인´에게 존경의 눈빛▼

전쟁의 포화 속을 뚫고 구호품을 전달하느라 사선을 넘나들어야 했던 한 젊은 목사는 아직도 불어터진 입술이 아물지 않았다. 그리고는 모금 운동을 하느라 음악회 기획에 정신이 없다.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이 이렇게 추운 밤엔 어디서 지내고 있는지, 저녁은 먹었는지….” 차 한잔을 들고 창 밖을 응시하는 그의 고뇌에 찬 모습에서 난 예수를 보았다.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에 훌륭하신 목사님들도 많지만, 나로선 종교적 신심이 돈독하지 못한 탓인지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3층 계단에서 한국어교육센터의 젊은이들이 내려온다. 오늘은 고려인 촌에서 한국의 설날 예절과 풍습을 가르치러 가는 길이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설날이구나. 모두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어색하게 웃는다. 아직은 어려서일까. 잠시 고향의 떡국 생각도 났던 것일까.

‘타슈켄트의 천사’들. 그대들이 있기에 인류에겐 희망이 있고, 그리고 우리 한국엔 구원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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