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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형박사 Jan 28. 2020

목욕탕의 외로운 총잡이

동아일보 칼럼 연재 2009.04.17 기재

『다음 칼럼은 90년대~ 00년대 이시형 박사가 젊은이들에게 보냈던 이야기입니다. 약 20년의 시간이 지나고, 그때의 젊은이들은 4-50대의 중년이 되었고, 이제 다시 새로운 20대의 젊은이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 나가려고 합니다.  지난 이야기를 읽으며, 그때에 비해 지금은 우리 사회는 얼마나 발전했는지, 어떠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는지,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




우리 때는 신혼 여행이랍시고 갔던 곳이라야 기껏 온양이나 동래온천 정도였다. 한데 요즈음은 아주 지천에 널린 게 온천장이다. 시내 한복판에도 있다. 쉽게 갈 수 있어 편리한 것까진 좋다. 시설도 좋고 값도 그만그만하다.

한데 우선 시끄럽다. 탕에 들어서는 순간 왁자지껄한 소리에 현기증이 난다. 느긋한 기분을 즐길 수 있기엔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물을 물쓰듯 하는 사람들▼

그리고 바닥에 어지럽게 널린 물통과 수건들을 헤집고 무사히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바닥에 널린 수건들이야 발로 치운다지만 수도꼭지나 샤워기에 걸린 것들은 어쩔 것인가. 몇 군데 기웃거려 보지만 사정이 다르지 않다. 결국 그 더러운 수건을 겨우 손가락으로 집어 치워야 한다. 바로 뒤 수거함에 몇 장의 수건이 쌓여 있는 게 신기할 뿐이다. 정말 신경을 긁는 건 그 다음이다. 샤워 물을 틀어 놓은 채 비누칠을 하고 있는 위인들이다.

그 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두 사람은 물을 틀어 놓은 채 아예 잡담을 하고 있었다. 조용하게나 있었으면 그래도 지나칠 수 있으련만, 이건 아주 주위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제 멋대로였다.

그 때였다. 수건을 치우던 종업원이 두 사람의 물을 잠가 주었다. 친절한 종업원이었다. 한데 이게 뭔가. “야, 왜 그래, 난 쓰고 있는데!” 

벌컥 고함을 질러댄다. 

“필요하면 제가 다시 틀어 드릴게요.” 

종업원은 자주 당해 보는 일이어서인지 예상이나 한 듯 크게 당황하는 것 같지 않았다. 손님도 어이가 없는지 더 이상 시비는 없었다. 사태는 거기서 끝나는 듯했는데 옆자리 젊은이가 불을 질렀다. 

“뭘 틀어줘? 필요하면 자기가 틀지.” 

물론 이건 종업원에게 한 말이었지만 화살은 문제의 손님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누가 들어도 도전적이었다. 

“뭐요? 남의 일에 웬 참견이요.” 

화가 난 손님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이게 남의 일이 아니기에 하는 소립니다. 첫째, 당신들은 너무 시끄러워요. 우린 여기 조용히 쉬러 왔지 당신들 떠드는 잡담, 고함소리 들으려고 온 게 아니거든요. 둘째, 당신들이 그렇게 물을 낭비하면 물값 전기료 기름값이 더 들테니 이 집 목욕료가 오르지 않겠어요. 우리가 세계에서 물을 가장 많이 쓰는 민족이란 것도 알고 계시겠지요. 그리고 바쁜 종업원이 당신 시중만 들 순 없지 않습니까. 거기다 지금 밖에는 가뭄으로 농사는커녕 당장 식수가 부족한 곳도 적지 않은데….”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샤워도 모두 끈 채…. 그리고 이 우람한 체구의 젊은이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말은 차분했지만 얼굴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여차하면 한 방 날릴 기세였다. 문제의 손님은 둘이었지만 이 젊은이의 체구가 워낙 당당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잔뜩 화가 났지만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것 같았다. 근처의 사람들 몇 명도 모여들었다. 이 용감한 젊은이와 일행은 아니었지만 만약의 사태에 누구 편을 들것인지는 내 눈에도 분명해 보였다.

“나 참 더러워서!”

세 불리를 의식해서였을까. 문제의 손님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비누와 수건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걸로 마무리돼 가는 듯했다. 

“손님, 수거함이 바로 뒤에 있습니다.” 

젊은이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예의도 발랐다. 하지만 이건 다분히 명령조였다. 옆의 친구가 얼른 수건을 집어넣었다. 그리곤 서둘러 샤워를 끝내고 나갔다.


▼젊은이의 작은 용기에 감동▼

이 때 그들이 나가는 등뒤에 모여든 사람들이 박수를 쳐댔다. 둘이 힐끗 돌아보긴 했지만 사태는 그로서 끝. 그때까지 나는 한마디 거들지도 못하고 마음만 졸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존경스럽습니다.” 

이게 그 젊은이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제 사람들은 뿔뿔이 탕으로 흩어졌다. 다시 웅성거림이 일긴 했지만 좀전처럼 시끄럽진 않았다. 바닥엔 수건도 널려 있지 않고, 누구도 감히 물을 함부로 쓰는 사람도 없었다.

난 그제서야 탕에 들어가 눈을 감았다. 느긋하고 기분이 좋았다. 아주 통쾌했다. 서부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불의를 보고 분연히 일어선 외로운 총잡이, 겁먹고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이 드디어 가세해 악당을 물리친다. 요즈음은 왜 이런 서부 영화도 없을까. 불의가 정의로 되는 ‘조폭’ 영화가 판을 치더니 모두들 정의 감각도 무뎌지고, 불의를 보고도 울분을 터뜨릴 줄 모르게 된 것일까.

그 젊은이가 보여준 작은 용기가 감동적인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목욕탕에서 벌어진 하찮은 일에 우리가 이렇게 감격해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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