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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경 Sep 15. 2020

이소라 「7」 그리고 나 (2)

왜 외롭냐건, 그저 사람 때문이지요

그때 난 아이야 외로운 아이야
힘없는 아이야 매일매일 울고

—이소라, ‘Track 6’


소라 누나의 7집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곡이다. 가사가 굉장히 추상적이다.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 해도 배열이 굉장히 특이해서 여러 갈래로 해석이 된다. 하지만 동시에 소라 누나의 7집 가운데 가장 외롭게 들리는 곡이기도 하다. 어쩌면 ‘바람이 분다’와도 굉장히 비슷해서 곡 안에 일종의 공간감이 느껴진다. 덕분에 코러스의 보컬은 듣는 사람의 온몸을 감싸는 듯하다.




약을 먹기 전에는 우는 것도 보통 우는 게 아니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웠을까? 친한 형과 통화를 하다가도 목소리가 끅끅 넘어갈 만큼 펑펑 운 기억도 여러 차례 있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허우대를 가지고 길 한복판에서 꺼이꺼이 우는 내 모습이 얼마나 추했을지는 상상조차 하기 싫다. 결국은 “외로운 아이”라서 그랬다. 나에게 외로움은 그냥 외로움이다. 난 ‘근원적 외로움’이라는 표현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생각한다. 근원적 외로움이라고 유달리 특별한 것일까? 그저 우리가 겪는 외로움이 장기적으로 보면 (특히 죽음이라는 존재 때문에)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혹은 그저 우리가 겪는 외로움이 물리적으로 보면 (너는 내가 아니므로)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에 지나지 않은가? 말 그대로 혼자인 나에겐 다 배부른 투정이다. 일단 누가 있어야 회자정리를 고민할 거 아닌가? 일단 누가 있어야 (테드 창이 「이해」에서 묘사하는 대로) 온전한 이해가 정말 불가능한지 테스트라도 하지 않겠나? 나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이 두려웠다. 누군가의 살갗이 내 살갗에 닿았으면 했다. 누군가의 속삭임이 내 귀에 울려 퍼졌으면 했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미소를 지어 보여주었으면 싶었다. 누군가가 나를 원했으면 했다.



아주 오래 지난
남자친구가 있긴 해
너무 놓으면 안 되니까
가끔 얼굴만 확인해

서로 아닌 척 하지만
차마 이런 말 못하는 것뿐야

다들 이러진 않아
시간 탓하진 말아
이젠 사랑이 안 된다니
이별이야



서로 아닌 척 하지만
우리 이제 그만인 걸
어쨌거나 즐거웠다
차마 이런 말 못하는 것뿐야

다들 이러진 않아
시간 탓하지 말아
이젠 사랑이 안 된다니
이별이야

다들 이러진 않아
사랑 탓하지 말아
매일매일 이렇다니
우린 남남이야

—이소라, ‘Track 2’


소라 누나의 7집 자체는 보편적인 사랑과 인생에 다루고 있는데 유독 ‘Track 2’만큼은 개인의 애정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가사를 잘 들여다보면 이 트랙 역시 앨범 전체 궤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화자와 남자친구는 “놓으면 안 되니까 가끔 얼굴만 확인”하는 관계이다. 오래 만나다 보면 권태기가 와서 애정이 식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맞다. 흔한 일이다. “시간 탓하진 말”라고 충고하는 것으로 볼 때 남자친구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곡의 핵심은 화자가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데 있다. 그녀는 “다들 이러진 않아”라고 여러 번 강조한다. 오래 봤어도 얼굴만 확인하는 것 이상의 ‘표현’을 주고받는 커플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상대는 “볼 만큼 봤잖아. 굳이 표현을 해야 알아? 안 해도 내 맘 알잖아?” 정도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 같다. 알긴 개뿔. 쌍욕을 퍼붓고 싶지만 “이런 저런 말 꾹 참는 것뿐”이다. 한편 코러스가 마지막에 가면 “시간 탓하지 말아” 대신 “사랑 탓하지 말아”로 바뀐다. 화자는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는 생각에 직접적으로 반기를 드는 것 같아 굉장히 인상 깊다. 이는 “이젠 사랑이 안 된다니”라는 표현과도 관계가 있다. “사랑이 없다니”가 아니라 “사랑이 안 된다니”라고 한탄하는 화자에게 ‘사랑’은 그냥 마음속에 생겼다 사라지는 설렘에 그치는 게 아니라 표현이자 행동이다.




나에게 친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저 누군가가 막연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눈에 보이는 표현, 눈에 보이는 행동이 필요했다. INFJ 종자들은 외부 자극을 감지하는 면에서 둔한 게 단점이라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적어도 사람과의 상호작용에 있어서 물리적 자극이 절실했다. 내 옆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주어야 했고 내 손을 어루만져주어야 했다. 물론 타인의 마음을 믿을 줄 안다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람마다 표현 방식은 다르고, 어떤 사람은 내가 전혀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애정을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노력 자체와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마음 자체를 믿어줘야 한다. 그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표현 자체를 하지 않는 것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그때는 내가 도대체 무슨 근거로 보이지도 않는 그 사람 마음을 어림잡아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 설령 그래야 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노력하는 만큼 상대도 내가 애정을 주고받는 방식을 존중한다는 최소한의 표시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 하지만 우연이라는 녀석의 장난질일까, 내 주위에는 유독 표현에 서툴거나 소극적인 사람이 많았다.


언젠가 내가 여기서는 말 못 할 문제로 끙끙 앓고 있을 때였다. 편의를 위해 그 문제를 ‘우울증’이라고 해보자. 거의 평생을 우울증으로 고통받던 내가 드디어 기쁨을 느낄 만한 것을 발견했다. 너무나 신난 나머지 나는 당시 의지하던 형에게 “형, 나 기쁨이 뭔지 알 것 같아!” 하고 자랑했다. 그 형의 대답은 “재경아, 조울증은 더더욱 안 돼”였다. “아주 오래 지난” 사이에 가능한 유머라고 받아들였으면 될까? 하지만 나는 가슴에 비수가 꽂혔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내가 지나치게 형에게 의존했던 것을 사과하는 한편, 이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면서 서운함을 표현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형은 자신이 원래 그렇게 자라왔기 때문에 미안하다는 말을 할 줄 모른다고 했다. 또 한 번은, 한창 외로움을 크게 느끼던 시기에 어느 형에게 집에 놀러 가도 되냐고 물었다. 그 형은 이유를 물었다.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냥 같이 있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형은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이 같이 시간을 보낸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난 생각했다. 오히려 그게 순수하게 서로에 대한 마음을 보여줄 기회가 아닌가? 어쨌든 그 형의 답은 ‘노’였고 나는 그것을 나 자체에 대한 애정이 부족한 탓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마음은 믿어줘야 하는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또 한 번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어느 형에게 펑펑 울면서 전화한 적이 있었다. 사실 그전부터 컨디션이 많이 많이 안 좋아서, 그저 2주에 한 번 정도씩 얼굴만 확인해달라고, 그것도 부담된다면 1~2주에 한 번 안부 전화만 해달라고 여기저기 부탁한 상태였다. 당연히 그렇게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은 굳이 남자끼리 남사스럽게 연락까지 해가면서 안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응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연락하는 것 역시 굉장히 꺼렸지만 그날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죽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과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의무감이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충돌해서 답답함에 거의 숨을 못 쉴 지경이었다. 하지만 하소연을 들은 형의 반응은, 뭐랄까, 이성적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형 성격에 최선의 답을 해준 것 같긴 하다. “너 그거, 본인 의지 아니면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해. 너도 네가 의지가 부족한 거 알잖아.”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내 의지로 꾸역꾸역 버텨나가는 여정에 누군가 손 좀 보태줄 수는 없었을까? 형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은 다 해줬다고 말했다. 그 이상의 표현은 내가 지나치게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로? 가끔씩 전화해서 빈말이라도 보고 싶다고 말해주는 게, 그렇게 엄청난 일이었을까? 나는 그날 넥타이로 목을 졸라 보았다.


인간관계라는 게 시간이 지나고 서로 익숙해지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표현이 줄어든다고들 한다. 사랑이라는 게 구수하게 발효가 되고 나면 서로 별다른 표현 없이도 마음이 통한다고들 한다. 글로 써놓고 보면 정말 예쁜 말들이지만 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시간 탓하지 말고 사랑 탓하지 말자. 장작을 넣지 않으면 불이 꺼지듯이 계속 표현하지 않으면 관계도 식기 마련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일방적으로 내 잘못이라고 스스로를 들쑤셨다. 표현 없이 마음을 믿지 못하는 내가 고장이 난 만큼이나 마음이 있음에도 표현을 할 줄 모르는 그들 역시 고장이 난 것이었음에도. 사람 사이에 쌓인 시간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은 결국 지나간 시간이다. 그거 하나 붙들면서 당장 지금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 자신의 나태함을 정당화하는 것은 너무나 부질없는 짓이다. 서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제3의 목적이 있을 때나 얼굴 확인하는 관계라면 그게 “남남”이랑 뭐가 다르다는 말일까? 어쨌든 나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계속해서 새로운 친구를 찾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사랑을 받지 못해 화가 난 내가 능동적으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달리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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