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 선샤인 _ 미셸 공드리, 2004
'누군가를 기억에서 지울 수는 있겠지만, 가슴에서 지운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영문 포스터 카피 - You can erase someone from your mind. Getting them out of your heart is another story.)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역순으로 지워나가던 조엘의 '정신'은 그들이 두 번째로 마주했던 서점에서의 기억에 가닿는다. 이 장면에서 인물들 뒤에 자리한 책들의 겉표지는 하나둘씩 하얗게 지워지고 있다. 평소 아날로그적인 시각 효과를 즐겨 쓰던 감독은 영화에서 서서히 지워져 나가는 조엘의 기억을 여러 '물리적인' 방식을 통해 표현했다. 건물을 무너뜨리고, 둘 이상의 공간의 세트를 뒤섞고, 핀 조명으로 부분 부분만을 비추기도 했는데,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그리고 가장 가슴 아프게 다가온 방식이 바로 이 서점 장면에서의 그것이었다.
날 기억해 줘.
Remember me.
결국 조엘은 간신히 형체만 남은 새하얀 책들에 둘러싸여 혼자 남겨진다. 어쩌면 기억이 지워지는 것을 막고 싶었던 그의 간절함이, 서점에 꽂혀있던 책들의 수만큼, 또는 그 표지에 적혀 있던 제목들의 글자 수만큼, 또는 책 안에 인쇄된 활자들의 수만큼, 그 '삭제'를 유예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의 방대한 기억의 축적이라 할 수 있는 책들은 한 개인의 망각을 가장 직설적으로 다룬 이 영화에서 깊은 울림을 주며, 지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