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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iYi Feb 12. 2016

그 대사, 테레즈의 명쾌함과 캐롤의 혼란

<캐롤> _ 토드 헤인즈, 2015


참 이상한 사람이에요, 당신.
What a strange girl you are.


테레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냐고 묻지만, 자기 입으로 점심 메뉴도 잘 고르지 못한다며 우유부단함을 고백해놓고서는 갓 만난 상대의 주말 초대에 주저 없이 'Yes'라니, 충분히 이상할만하다. 지난한 개인사에 치이고 치이던 캐롤이 결정적으로 테레즈에게 푹 빠지게 된 계기는 아마 이 단순명쾌함일 것이다. 그녀는 리처드와의 관계 등에 있어서 다소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그나마도 고민의 궤는 그를 '어떻게 거절할지'의 문제다), 캐롤에 관해서 만큼은 주저와 망설임이 없다. 특히 캐롤의 집으로 향하는 '긴' 터널을 지난 이후, 그리고 카메라를 명확히 캐롤에게 맞추고 셔터를 누르기 시작한 이후의 그녀는 그야말로 거침없고 대담하다. 노골적으로 욕망의 제스처들을 보이는 것은 물론이며, 우연이긴 했지만 여행 중 처음 손을 잡은 쪽도 테레즈다. 영화 후반부에 자신이 거절을 잘 못하는 탓에 일이 벌어졌다고 자책하기도 하지만, 리처드나 대니의 제안은 큰 무리 없이 거절해오던 그녀다(사실 영화 내내 남성들은 철저하게 그녀의 관심 밖이다). 캐롤의 잔인한 이별 통보에 실망해 있던 와중에 머뭇거린 러닝타임 상 짧은 구간을 제외하고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테레즈의 선택은 언제나 캐롤, 캐롤, 캐롤이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고 있지?
Tell me you know what you're doing.

아니... 알았던 적도 없었어.
I don't... I never did.


당연히 '알고 있다'는 대답을 기대하고 던졌을 애비의 질문에 캐롤은 무언가 씁쓸한 미소와 함께 '모르겠다'고 답한다. 이 대답에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는 자조가 섞여있다. 영화의 서사는 언뜻 테레즈의 성장기로 오인되기 쉽지만, 관계를 통해 더 크게 변화하고 성숙하는 건 되레 캐롤 쪽이다. 영화 전체에 걸쳐 혼란 속에 있는 쪽도 그녀다. 이 혼란의 결정적 계기는 테레즈다. 그녀의 순수함과 솔직함, 명쾌함과 마주한 캐롤이 자신의 일들을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주변의 남성들을 배제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는 테레즈와 달리 캐롤은 딸 린디로 인해 전 남편 하지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녀는 그의 권유(또는 협박)를 이기지 못하고 시댁의 파티에 참석하거나, 딸과의 크리스마스를 포기해야 했으며, 심지어 그가 선물한 향수를 계속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녀의 고민과 주저의 바탕에는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과 엄마로서의 정체성이 양립할 수 없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그녀가 결국 이것이 단순한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며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선택이 좋은 엄마가 되는 선택과 같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계기는, 그저 차창 너머로 목격한 밝은 거리를 씩씩하게 걸어 나가는 테레즈의 모습이다. 캐롤의 진일보한 결단은 '사랑이냐, 모성이냐'와 같은 해묵은 도식으로부터 훌쩍 벗어나 있다.



오프닝 쇼트에서 정체불명의 패턴을 가만히 비추던 카메라는, '이게 뭘까, 고급스러운 문양 같은 건가?'하고 지레짐작하려는 찰나에 카메라를 들어 올려 그것이 뉴욕 거리의 배수구 커버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이야기를 가난하고 우유부단하며 성 정체성이 불명확한(?) 테레즈가 부유하고 주관이 또렷한 레즈비언 캐롤을 만나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건 겉으로 드러난 나이, 계급, 재력, 그리고 동성애라는 틀에 갇혀 진짜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히려 오랜 고민을 안고 있던 캐롤이 시종 명확한 태도의 테레즈를 만나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영화 전체에 걸쳐 그려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적어도 '그냥 섹스만 했던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다'(by 리처드. 자꾸 까서 미안해..)는 식의 빤한 클리셰에 속아 넘어가지는 말자는 거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 특히나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정해진 물리 법칙대로 튀어 오르는 '핀볼 게임'이 아니니까. 무엇보다 이 영화는 동성애자가 쓴 원작을 가지고 동성애자인 감독, 각본가, 제작자가 힘을 합쳐 만들어낸 2015년의 영화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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