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 _ 연상호, 2016
석우 일행은 터널의 어둠을 틈타 열차 선반 위를 조심스럽게 기어 좀비 무리를 통과하는 데에 겨우 성공한다. 이제 선반에서 내려오는 일만 남은 상황. 먼저 내려온 성인 남성 둘과 고등학생은 임산부와 어린이, 노인을 차례로 내려 준다. 그리고 뒤이어 일행의 마지막 일원인 노숙자가 조심스럽게 다리를 내리는데, 마지막 순간에 그만 '삐끗', 결국 모두가 위험에 빠지게 된다.
영화를 보고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다가 위 장면을 언급하며 노숙자의 '민폐'를 지적하는 댓글들을 처음 접했을 땐 별생각 없이 지나쳤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아 있던 장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처음 본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밝은 대낮에 기차를 배경으로 좀비들이 쏟아져 나오는 생경한 비주얼이나, 내가 살아남기 위해선 다른 이들을 끌어내려야 하는(좀비로 만들어야 하는) 자본주의적인 속성을 소재에 효과적으로 녹여낸 설정, 그 설정에 잘 들어맞는 인물들(펀드매니저인 석우나, '살아남는' 방법을 제일 먼저 깨닫고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용석 등), 그리고 명백하게 세월호를 연상시키는 몇몇 장면들(잘 대응하고 있으니 침착하게 있으라는 거짓된 정부 발표를 전하는 방송이나, 친구들을 구하지 못하고 자기만 살아남은 것을 자책하며 눈물 흘리는 고등학생 등)과 같은 것들이었다. 조연급 인물들 중에서도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연대와 같은 것이 느껴지던 할머니 두 분이나, 어른들과 달리 자기 자신의 안위를 먼저 챙기는 판단을 내리지 못하던 고등학생 캐릭터들에게 마음이 갔지, 노숙자는 거의 관심 밖에 있었다.
꼬마야, 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나중에 저렇게 된다.
그의 존재가 눈에 들어온 것은 서울역 근처 노숙자들이 중요한 역할로 등장하는 <부산행>의 프리퀄 작품인 <서울역>을 보고 난 뒤에 <부산행>을 두 번째로 보게 되었을 때이다. 자연스럽게 그에게 자꾸 눈길이 갔고 그의 행적을 쫓아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대전역에서 다급하게 열차에 올라 좀비들을 피해 화장실로 몸을 숨긴 네 사람이 하필이면 임산부, 어린이, 노인, 그리고 노숙자라는 상황 설정의 공교로움 역시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그중 노숙자는 최초 탑승 때부터 유일하게 환영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네 사람 중 대전역에서 마지막으로 열차에 오르게 된 것 역시 그였는데, 위험천만한 순간에 다시 열차 문을 열어준 성경의 숭고한 선택이 없었다면 그는 다시 기차에 탑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원래의 장면으로 돌아와서, 왜 선반에서 먼저 내려온 '힘'을 가진 이들은 다른 세 명의 '약자'들과 달리 노숙자에겐 도움의 손길을 건네지 않았을까? 그에게도 마찬가지의 도움이 주어졌더라면 그 '삐끗'은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 역시 성인 남성이므로 혼자 내려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렇다고 보기엔 영화 초반부터 그가 다리를 절고 있는 모습이 수차례 등장하며, 특히 대전역에서 다른 출구로 빠져나가려다 그와 1:1로 마주했던 석우가 그 사실을 모를 리는 만무하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휴대폰 벨소리 같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력을 지닌 석우가 거동이 불편한 노숙자를 도와야겠다는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는 것, 여기에서 무의식적인 '배제'의 심리를 읽어내는 건 무리한 해석일까? 당장 나부터도 자신 있게 아니라고 답하기 망설여지는 그 미묘한 심리는 사회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여론은 여전히 노숙자를 사회적 지원이 필요한 약자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오히려 '무기력자', '혐오 유발자', '잠재적 범죄자' 등의 프레임에 가두려 드는 쪽이 우세해 보인다. 근본적인 원인이나 해결책에 대한 분석보다는 사건, 사고 위주의 보도를 일삼는 언론은 그러한 프레이밍을 되레 부추기고 있다는 인상이다.
이 새끼 감염됐어!
노숙자들은 정말 애초부터 나태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이어서 그런 처지에 내몰리게 된 것일까? 그들을 배제하고 격리시키는 것이 그 '삐끗'을 차단할 수 있는 좋은 해결책일까? 적어도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다. 석우 일행이 겨우겨우 도착한 15호칸에 있던 승객들은 다른 칸에서 넘어온 이들의 감염 여부를 의심하며 연결 통로 쪽으로 그들을 내몬다. 하지만 그 격리는 감염을 막기는커녕 더 큰 화를 불러오는 계기가 된다. 15호칸 사람들이 석우 일행에게 당장 나가라고 외칠 때, 다른 일행들이 머뭇거리는 와중에 노숙자만은 이런 대우가 익숙하다는 듯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먼저 걸어나간다. 자본주의의 속성이 처절하게 구현된 이 열차 안에서 그는 아마도 최하층에 속하는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단지 '현재로서' 그가 남들보다 조금 더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일 뿐이다. 아무리 쉼 없이 달려도, 용석처럼 다른 이들을 몇 번이고 끌어내려도 우린 뜻하지 않게 좀비에 물릴 수 있다. 공존이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 언제든 '삐끗'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노숙자에게 거의 유일하게 온전한 도움의 손길을 건네었던 성경은 가장 위험한 순간에 그 보답을 받는다. 영화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서 만약, 격앙된 채로 두려움에 떨며 기차에 오른 그에게 밖에서 그가 겪은 일에 대해 찬찬히 물어보았다면 어땠을까? 모두가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건네주었더라면, 이야기는 혹시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