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ll me your darkest secret
서른 일곱 먹고 처음으로 사주를 보러 갔다. 지인이 블핑 제니가 사주 보는 곳과 BTS가 보는 곳 두 군데를 소개해줘서 그 중 더 비싼 곳으로 갔는데, 한 줄 요약하면 앞으로 다시는 사주를 보지않을 것이다. 정확하게 올해 '대박난다'를 듣고 싶어서 갔는데, 그 '올해'라는게 없으니까 며칠 신경이 쓰였다. 아무리 좋은 소리를 뭉터기로 해줘도 내가 듣고 싶은 말 하나가 없으면 초조해 지는게 인간인가보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내 성격에 듣고 싶은 말 나올 때까지 돈 쓰겠구나 싶었고. 기생충이 아카데미 가서 상 탄 해가 대박 해지 그 전에 프리하고 촬영 할때가 대박이겠어? 그땐 존나 힘든게 당연한 거 아니야? 하면서 에이시 쌩까 하고 넘기기로. 내 인생 책임지는 건 역술인 사인펜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내 스스로의 정신과 노력이다. 앞으론 사주 볼 돈으로 맛있는 걸 사먹거나 그 돈으로 스스로 혹은 소중한 사람들에게 좋은 선물을 하겠다 다짐했다.
그래도 도움이 되는 말이 하나 있었는데,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 듣고 조금 벙 쪘던게.. 욕심을 어떻게 버려야 되는 건지를 아예 몰라서 였다. 그래서 이 조언을 두고는 고민을 좀 해봤다. 나는 욕심과 야망이 남들에 비해 많이 큰 편이라 종종 스스로를 괴롭힌다. 이것은 나를 멀리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스스로와 주변을 괴롭히는 요인이자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며칠 생각 끝에 겸손을 떠올린다. (나는 이게 며칠 생각해야 나올 정도의 한심한 인간이다..) 꿈의 크기를 줄이는 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고, 그렇게 살면 나는 오히려 우울증이 올 것 같았다. 욕심을 어떻게 버릴 수 있는 걸까?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의 평안이 오고 행복하게 일하며 삶의 균형을 찾을 수 있는 걸까. 꿈을 낮출 수 없다면, 이상이 아니라 마음을 낮은 곳에 두어 보기로 한다. 진심으로 겸손할 것, 자신감은 그대로 두고 선배들과 동료들을 후배들을,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는 이들 하나 하나를 존중하고 배려할 것. 감히 누군가의 삶을 평가하지 말 것. 이미 그렇게 살려고 굉장히 노력하는 편인데.. 더 해야지.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하지만 나를 잃지 않아도 되는, 내가 내가 아닌 척까지는 하지 않는,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라고, 다시 한 번 새해에 다짐해본다.
얼마 전에는 심리상담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용하다는 역술인도 내 가장 큰 불안과 슬픔은 맞추지 못했고 (돌팔이 아니냐고) 일전에 정신과 상담을 받았을 때도, 내가 원하는 말이 안 나오면 짜증이 났던 터라.. 하.. 이 정신나간 성격.. 명의 찾아다니며 돈 쓸 생각도 없고, 주변 친구들을 봐도 유유상종이라 성격이 비슷하여 정신과 선생 말에 틀렸다고 그/그녀를 오히려 설득하고 나오는 유형의 인간들인지라.. 난들 다른 병원 간다고 뭐 다를까 싶어 올해는 익명의 심리상담 커뮤니티에 도전해 본다.
커뮤니티는 역술인처럼 나의 문제에 단박에 정답/오답을 내려주진 않았다. 그저 각자의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고민들을 모두가 차분한 문장으로 털어 놓을 뿐이었고 작은 위로와 응원들을, 내가 감정에 휩싸여 보지 못하는 객관적 시선들을 제시할 뿐이다. 그렇게 올라온 글들을 하나 둘 읽고 소화하면서, 나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러 간 이 곳에서.. 삶을 멀리 떨어져 보는 통찰을 배운다. 내가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근심 걱정 없는 인스타나 유투브와 달리 익명성 속에서 사람들은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제각각의 첨예한 고민과 불안, 우울 속에 산다. 너의 불행을 만나 반가운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인간의 당연한 감정이고 너무나도 쉽게 할 수 있는 실수들이라는 것에, 후회와 슬픔이 용인된다는 것에 안도한다. 우리의 가장 속깊은 고민들은 우리 자신을 인간답게 만들고 성숙함으로 이끄는 삶의 숙제들이라는 것, 휘몰아치는 고민들도 멀리 떨어져 보았을 때는 반짝이는 우주 속 별처럼 예쁘고, 삶을 어떻게든 긍정하려는 면면으로 보인다는 것, 슬프고 상처 받았을지라도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해 고민하는 하나의 예쁘고 소중한 이야기들이 모인 곳이 사회구나 하는 생각. 진솔하게 털어놓은 이야기에서 주는 위로가 좋은 이야기가 주는 힘과 다르지 않았다. 내 마음을 울렸던 이야기, 배우의 표정, 섬세한 연주를 떠올린다. 그래서 아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구나, 내가 하는 창작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삶을 돌이켜 볼 수 있게 하고, 기쁨과 의미를 찾아주는 일이구나. 그런 이야기를 쓰고, 그런 화면과 연기를 나는 만나고 싶구나 복기하게 된다. 오랜만에 다시금 내가 하는 일을 긍정하고 사랑하게 된다.
우리의 데일리한 삶은 화려한 인스타와 익명 심리상담 커뮤니티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 같다. 화려함을 동경하는 마음도 진짜 감정이고, 익명성에 숨어 나의 가장 가난함을 드러내는 것도 진짜 감정이다. 그리고 서로를 대면하는 일상에서 우리는 이 괴리에서 생기는 오해와 시기 질투들과 마주하며 다이나믹을 쌓아나가고, 그 아이러니가 한 편의 훌륭한 이야기가 된다. 언젠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에서 필립세이무어 호프만이 했던 말처럼. 진짜 좋은 예술은 죄책감이나 갈망, 섹스를 가장한 사랑이나, 사랑을 가장한 섹스를 다루는 거니까.. 좋은 이야기가 주는 힘이 무엇인지를 나는 2022년 새해에 심리상담 익명 커뮤니티 속 회사가기 싫어요 죽고싶어요 이혼하고 싶어요 인간이 싫어요 속에서 되새긴다.
내가 받은 위로를 결결이 전할 수 있도록. 더 수련하고 정진해야지. 더 좋은 사람이 되서 더 좋은 이야기를 쓰겠다. 내 가장 가난하고 슬픈 마음을 통해서. 사람들을 위로하고 웃겨줘야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가자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