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USE OF GUCCI
올더머니 이후의 리들리 스콧 영화를 좋아한다. 인간 심리와 세상사에 관통해버린 이야기들은 이제 셰익스피어 희비극의 반열에 오른 것 같다. 직전의 라스트 듀얼은 배우와 작가을 위한 교본으로 써야된다 싶을 정도로 좋았는데, 하우스 오브 구찌도 캐릭터 배치가 못지 않다. 현대극에서 이런 배치를 살린다면,, 글쎄 펜트하우스 정도 되는 극적 상황이 나와야 할 텐데 대놓고 막장 컨텐츠가 아닌 이상 PC함이 트렌드인 지금, 현재를 그리는 컨텐츠들에서 극적인 인간군상을 보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실화나 시대극을 바탕으로 나오는 이런 욕망에 질주하는 악녀들을 볼 때면...! 여자들은 현실에서는 인상을 찌푸리지만 내러티브 속에서는 환호한다.
레이디 가가처럼 화려한 캐릭터는 등장하지 않지만 하우스오브 구찌를 보며 올더머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올더머니의 특별함은 변화하는 미셸 윌리엄스 캐릭터에 있다. 손주가 납치되어 손가락이 잘렸는데도 몸값을 내주지 않는 시아버지의 비정함, 미셸 윌리엄스는 처음에 그에 분개하지만 영화 끝에서는 그와 같은 재벌식 사고를 한다. 돈에 대한 관념을 맛 본 뒤 욕망이 옮아붙듯, 하우스 오브 구찌의 레이디 가가의 욕망 또한 아담 드라이버에 옮겨 붙는다. 맹송맹송 착한 도련님에게 들러붙은 야망녀의 욕망은 도련님을 변화시키고 결국 계산없는 사랑이었던 아내 또한 성에 안 차는 어울리고 싶지 않은 여자로 만든다. 이 욕망이 커질 수록 행복과 가족들은 무너지지만 브랜드는 성공가도를 달린다. 돈도 그렇지만 구찌 또한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 처럼 자신의 야망을 더욱 활개치게 만들어줄, 욕망의 편에 붙는 것. 그래서 결국 구찌에 구찌가는 단 한명도 남지 않게 되고, 이글대던 욕망을 놓아버리지 못한 이들은 모두 자멸한다.
두시간 반이 넘는 러닝타임 끝에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욕망이 넘치는 악녀의 성장과 부흥과 질투, 파멸도 있지만 동시에 욕망의 속성이다. 욕망은 실제로 사람을 성장시키고 꿈을 이루게 만들고 더욱 높은 곳으로 나아가게 한다. 좋은 욕망 나쁜 욕망을 뜬소리처럼 나눌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나쁜 욕망으로 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개인이 가진 비범함의 문제 같다. 평범한 사람들의 욕망은 내 가족을 보전하고, 월급을 알맞게 융통하여 불리는 등 건강하고 안정적인 것에서 그친다. 하지만 타고난 욕망과 야심이 큰 사람들, 비범한 두뇌와 꿈을 가진 사람들은 왠만해서는 거기서 멈추지 못한다. 그리고 이 욕망은 크면 커질 수록 같은 크기의 야망을 가진 동승자들이 생긴다. 이들 가운데는 발톱을 숨긴 채 나보다 더 큰 욕망의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는 재능 넘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이들 눈에 나는 부적격 대상자가 된다. 질주하는 욕망 안에는 PC함이 없다. 그저 굶주림 만이 있을 뿐이다. 더 잘 될 수 있는데 안 할 이유가 없는 것, 오직 그 논리만이 존재한다. 더 나이질 수 있는데 가만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된 순간 분명 외적으로 우리는 성공하지만 내가 키워낸 성공은 가장 굶주린 시기에 나를 버리고 더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틈타 사라진다. 누가 그랬지 돌고 돌아서 돈이라고.
영화를 반면교사로 내 것이 아닌 것에 욕심을 내지 말자 생각하면서도. 그 시기라는 걸 대체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냐 생각한다. 그래서 좋은 이들을 곁에 두면 좋겠지만 내 욕망이 크다면 어울리는 이들의 욕망 또한 만만치 않게 클 것이다. 재능이 있고 욕망이 있는 이가 어찌 뻔히 보이는 것 앞에서 뒤돌아 도닦듯 내가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길 수 있을까. 욕망과 배신은 함께 간다. 한 개인의 삶에서 보면 뒷통수와 배신 파국이겠으나, 거시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면 이러한 욕망들은 역사와 한 시대의 문화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여기서 더욱 영민하고 재빠른 이들은 이 피로 물든 장갑을 숨기기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의'를 만든다. 결국 이를 평가하는 것은 역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