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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바네 Mar 28. 2023

잃어봐야 그 소중함을 안다.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습니다#6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힘들어하는 걸 알고 비슷한 또래를 키우는 친구가 전화해 준 것이다. 한 시간쯤 수다를 떨고 나니 아이가 첫 번째 낮잠을 잘 시간이다. 아이를 재우고 뭔가 하다 보니 점심시간이다. 그토록 지루하고 외로웠던 오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뒤로 그 친구와 매일 한 시간씩 통화를 했다. 영상통화를 켜놓고 각자 애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육아 이야기, 운동 이야기, 심바 이야기, 남편 이야기, 온갖 잡다한 이야기들. 통화를 하는 동안에도 내 상황은 변한 것이 없었다. 심바는 여전히 틈만 나면 짖었고, 아기를 돌봐야 했고, 이유식을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내 속에 쌓여 있는 이야기를 뱉어내니 예전처럼 괴롭지 않았다. 내 감정의 잔이 넘쳐흐르지 않았다. 그렇게 심바는 내 감정의 쓰레기통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기가 돌이 좀 지났을 때였다. 어릴 때부터 관절이 좋지 않던 심바가 또 다리를 절었다. 심바는 어릴 때 슬개골과 고관절을 수술했다. 그래서 다리 상태를 신경 쓰며 키우고 있었다.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다. 골암으로 보인다는 소견을 받았다. 큰 병원에 가서 CT를 찍어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상태가 심각하면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했다.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슬프지도 않았다. 아니면 내 몸에 아직 출산 후 행복의 호르몬이 남아 있어서 슬프지 않았었나. 아기를 엄마에게 맡기고 남편과 함께 CT촬영이 가능한 큰 병원으로 향했다. 


남편에게 물었다. "진짜 다리를 잘라야 하면 어떡하지?" 

남편은 대답했다. "뭘 어떡해. 계속 키워야지." 


나는 감정이 요동치지 않고 잔잔한 그를 사랑한다. (어떨 땐 냉정한 그의 대답이 서운할 때도 있지만.) 

맞다. 뭘 어떡해. 치료받고 계속 키워야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심바가 많이 아플 수도 있다는 게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저 조그만 강아지가 다리 하나가 없는 채 남은 삶을 살아야 할 수도 있다고. 다리가 네 개인 지금도 다리에 힘이 없어 넘어지기도 하는데, 세 개로 균형을 잡고 지내야 할 수도 있다고. 나는, 그런 강아지를 때리며 키웠다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이 일은 그냥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었다. CT상 암으로 보이는 것은 없고, 다만 다리뼈를 고정할 수 있게 깁스를 며칠 하자고 하셨다. 긴장이 풀렸다. 다시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았다. 

너를 그렇게 괴롭히며 키웠는데 너는 다행히 건강히 버텨주었구나. 고마웠다. 왜 소중한 것은 잃어봐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되는 걸까. 왜 인간이란 이 모양일까. 소중한 것이 옆에 있을 때 소중한 줄 알면 안 되는 거니. 나란 인간아. 



이 사건이 있고 나서 다시 심바를 잘 돌봐야 한다는 의지가 생겼다. 그런데 그동안 내 머릿속에 아기를 키우는 방법이 가득 차 버려서 도무지 심바 교육은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심바랑 잘 지내보고 싶은데 어떤 태도로 강아지를 대했었는지, 짖을 때마다 내가 어떻게 했었는지 그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아기 낳기 전에 몇 년 동안 교육을 받으며 심바를 돌봤는데. 어떻게 이렇게 까맣게 잊을 수가 있지? 문득 욕설이 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사람들에게 1분 동안 단어 카드를 하나씩 보여주며 단어를 외우도록 하는데, 중간중간 욕설이 섞인 카드를 함께 보여준다. 그러면 사람들은 먼저 외웠던 걸 잊고 욕설만 기억한다. 강력한 자극이 뇌를 지배하는 것이다. 내가 심바를 때렸던 두어 달의 기간 동안 나는 심바를 잘 돌보는 법을 잊었다. 폭력이 이렇게 무섭다. 


아기를 낳기 전 심바 산책교육을 도와주시던 훈련사님을 만나 그동안의 이야기를 했다. 아니, 고해성사를 했다. 조금은 혼날 각오로 이 자리에 나갔었는데, 훈련사님은 나를 꾸짖지 않으셨다. 다 들어주시고 지금 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과 내가 가질 마음가짐을 알려주셨다. 그렇게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나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아기와 강아지를 함께 키우는 걸 아는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아이와 강아지를 함께 키우면 아이 정서에 좋지 않나요?"

그러면 나는 항상 같은 대답을 한다. 

"엄마가 더 화를 내고 시간이 없어서 오히려 안 좋은 것 같아요."


반은 진심이고 반은 농담이다. 모든 강아지가 심바 같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둘을 함께 키우면서, 왜 유기견 보호단체에서 신혼부부에게는 입양시키지 않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출산 후 강아지를 파양 하는 부부의 마음도 절절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 마음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 결정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출산 후 친정부모님이 심바를 돌봐주겠다고 여러 번 제안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지금 보내면 다시는 데리고 올 엄두를 내지 못할 거라는 걸 확신했기 때문이다. 인터넷 속에는 아이와 강아지를 함께 키우는 아름다운 모습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짧은 영상, 귀여운 사진 뒤에 어떤 고생과 난리통이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난리통이라도 가족이 함께 사는 것을 택했고, 우리 가족은 이 난리법석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 아기와 강아지를 함께 키우는 것을 고민한다면 나는 반대에 한 표를 던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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