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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Aug 02. 2024

장마가 끝났습니다

한옥의 여름

   


온라인 서점에서 잔뜩 골라 배송해 놓고 포장도 뜯지 못한 채 집 현관 근처에서 일주일째  방치 중이던 책더미에서 드디어 소설책 한 권을 꺼내 종일 거실 소파에 늘어지게 기대앉아 책을 읽다가 날이 너무 좋아서 잠시 책을 덮어 두고 손만 대도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로 시린 캔맥주를 꺼내 시원하게 들이켜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과감히 밖으로 – 집은 1층이다 – 나가 텃밭을 살피다가 듬뿍 물을 주고 나무가 되어 가는 깻잎 모종에서 깻잎을 항그시 따와 부침개를 부쳐 먹었다. 아직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이 얼마 만에 맛보는 평화와 안정인가!"     





마지막 낮맥이 언제였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흘러가는 평범한 하루가 그립다. 지난주에 드디어 표지를 넘어 절반까지 나아간 소설책의 다음 상황이 궁금해 죽겠지만 내게 누군가의 위대한 영감이 적힌 종이를 들여다볼 여유 따위 허락되지 않았다. 이걸로 3일째 재고 상자를 옮기고 청소를 하는 중인데 이 무한 굴레가 끝나긴 하는 건지 의문을 품던 마음도 못내 수긍 쪽으로 반응을 틀어버렸다.

"그래, 이것도 행복이지. 이 정도면 심하지 않잖아. "


아직 본격적인 장마 구름이 몰려오기 전부터 7월 하늘은 심상치 않았다. 무거운 빗방울이 쉴 틈 없이 쏟아져 내렸고 기상청도 미처 예보하지 못한 이상 기후가 나를, 한옥을 괴롭혔다. 화창한 날씨에 빗방울만 떨어진다거나 여긴 비가 내리는데 옆동네는 화창하다거나 하는 이해할 수 없는 날이 잦았다.


“어디 열대우림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거야 지금?”

“그러게 이럴 바엔 차라리 아마존으로 여행을 가지.”


어느 날은 비가 왔고 어느 날은 천둥 번개가 쳤고 어느 날은 때 이른 폭염이었다. 이틀 연속 시원하게 빗줄기가 쏟아졌고, 다음 날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화창하게 날이 갰다. 이제 새파란 하늘과 작열하는 태양이 이어질 때인가 싶어 반가운 마음으로 출근했는데 한옥 안에서 요상한 냄새가 났다.

"이게 무슨 냄새지?"     


잠시 하수구의 악몽이 떠오르며 양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오픈 초반 인테리어 업자 측의 실수로 하수구가 막혀 역류한 적이 있음) 안으로 들어갈수록 냄새는 심해졌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원인을 알 수 없어 포기한 채 환기라도 시키기 위해 창과 문을 활짝 열고 책상에 앉았는데 발밑 감촉이 평소와 달랐다. 실내화를 신고 있어서 몰랐는데 카펫은 젖어있었다. 길이가 2M가 넘는 대형 카펫은 재질마저 밧줄 혹은 꼬아 놓은 새끼줄을 연상케 하는 특이한 직물로 구매할 때부터 ‘이건 세탁이 어렵겠는데’ 불안한 느낌이 들던 제품이었다. 이 특이한 카펫이 상한 냄새의 근원이었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리면 화도 안 나고 입술을 비집고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온다던데 ‘허허허’ 헛웃음도 사치였다. 서둘러 저 아래 있는 재고 상자를 옮겨야 한다는 위기감으로 가구를 빼고 물에 젖은 카펫을 마당에 내던지고 (어찌나 무겁던지 둘이 낑낑대며 겨우 던졌다) 없던 힘을 짜내 노트로 가득 찬 상자를 연달아 날랐다. 이미 아랫부분이 우유에 적신 식빵처럼 푹 젖어버린 상자를 보고 절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살리겠다고 마른 바닥에 상자를 옮겨 미친 듯이 노트를 꺼냈다.


수분을 잔뜩 머금은 노트들이 줄줄이 딸려 나왔고 어찌나 형제애가 강한지 아래에 깔린 형제의 수분을 빨아들여 위에서 짓누르는 형제에게 전달 중이었다. 하필이면 사철제본에 금박까지 찍힌 단가가 높은 제품이었다. 덕분에 내가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을 끄적거릴 종이뭉치가 책상에 쌓여버렸다.

 

최근 7일 동안 손꼽힐 정도로 화창한 날이었으며 전날까지 아무런 이상 증후도 없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물 폭탄이 내리던 엊그제에 물바다가 되었다면 수긍이라도 하겠는데 화창한 날 갑자기 출처도 모를 물이 새니 지난밤에 줄곧 꽝꽝 내리치던 천둥 번개가 머리 위로 떨어진 심경이었다. 의심이 가는 구석은 꽤 있다.

'낙엽이나 쓰레기로 막힌 뒤쪽 배수구멍이 막혔을 수도, 아니면 빗물받이에 구멍이 생겼거나, 문 사이에 틈이 있을 수도 있지.'


모든 가정은 빗물이 철철 흘러내려 길가를 점령한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도대체 이렇게 쨍한 날, 어디서 물이 나왔냐는 말이야.     



한옥 관리비가 없지만 한 번에 돈이 많이 나가죠


여러 돌발상황을 겪으면서 나는 (다행히) 성장했다. ‘수긍’을 알게 되었다. 본디 화가 많고 자존심을 부려 내가 잘못했다거나, 상황이 악화되는 중이거나, 포기해야 하는 때를 인정하기 어렵고 화와 짜증을 먼저 부리고 했는데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감정과 태도는 침착과 수긍이었다. 현실을 수긍하는 척이라도 하고 심호흡으로 침착을 위장한 후 차근차근 꼬인 실을 풀어보려 나를 속인다. 신기하게도 진짜 수긍하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하수구가 역류할 때, 1,000부가 넘는 제품 인쇄 오류가 났을 때, 연말 정산이라는 거대한 벽과 마주했을 때, 공사 일정이 밀렸을 때, 전기가 나갔을 때... 꽤 싼 값을 치르고 수긍을 얻었으니 이만하면 얻는 장사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라는 말처럼 걱정은 하면 할수록 상황이 악화될 뿐이다. 어쩌겠는가. 어딘가에서 새어 나온 물의 뺨을 왜 여기로 흘러왔냐며 찰싹 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짜증을 낸다 한들 내 머리만 아프고 함께 있는 사람만 힘들 뿐이다.


급한 대로 던져 놓은 카펫은 마당 한편을 가득 채웠다. 내가 세탁소 주인이라도 맡기 꺼려지는 무게와 크기였다. 스스로 하는 수밖에. 물에 탄 세제를 구석구석 뿌리고 솔질을 시작했다. 도대체 이 카펫은 물과 거품을 흡수해 버리는 건지 아무리 세게 문질러도 보글보글 거품이 올라오지 않았다.

“이거 얼마였지?”

“왜?”

“그냥 버릴까 봐.”     

아니 아니지, 정신 차리자.


헹구고, 헹구고, 또 헹궈서 겨우 거품을 빼고 담벼락에 걸어서 말리려다가 무게에 짓눌려 옆으로 비틀거리다가 풀썩 주저 안고 말았다. 성질이 날 것 같아 의자를 꺼내와 마당 한가운데에 조형물처럼 걸어버렸다. 덕분에 주말 동안 마치 작품을 구경하듯 젖은 카펫을 유심히 살피다가 들어오는 손님들을 보며 새어 나오는 즐거운 웃음을 삼켰다. 완전히 마르기까지 장장 4일이 걸린 이 카펫은 원래 자리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들어가 있다. 정말 얄밉다.     



한바탕 한옥을 휩쓴 장마가 끝나고 진짜 여름 더위가 찾아왔다. 30도만 넘어도 덥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젠 33도, 34도가 우스울 지경이다. 마당에서 잡초를 뽑고 물을 주고 벌레를 잡다가 불현듯 핑 - 눈앞이 돌면 ‘아 폭염이구나’ 싶어 서둘러 안으로 들어와 이온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비가 내릴 땐 제발 적당히 내려라, 차라리 햇볕 쨍한 게 났겠다 하늘을 향해 외쳤는데 지금은 차라리 비가 내려 더위를 씻어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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