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래 Aug 21. 2024

습관에 관하여

내 작은 서랍


우리는 한 번 엉덩이를 붙이면 얼마 동안 앉아 있을까?

아직 아파트 단지나 대형마트가 들어오기 전, 우리 동네에는 초등학교가 딱 하나였다. 동네친구들은 다 같은 학교를 다녔고 당연하게도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과 매일 몰려다니곤 했는데 이는 엄마들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의 주요 커뮤니티는 초등생 자녀를 둔 아파트 아줌마들이었다. 지금처럼 맘카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카톡이나 네이버 밴드 같은 메신저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엄마들은 인터폰과 집전화로 만날 약속을 잡거나, 오후 3시면 찾아오는 두부장수 아저씨의 딸랑딸랑 종소리를 듣고 말이라도 맞춘 듯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정보를 공유했다.


모이면 ‘우리 00이는 한 번 앉으면 3시간은 망부석이라니까! 화장실도 안가’라고 자랑을 늘어놓고 ‘아이고 우리 XX이는 밥 먹으라고 할 때까지 지방에서 안 나와’ 하고 우리들의 엉덩이를 가지고 배틀을 벌이곤 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오래 앉아 있는 우리들의 엉덩이 습관이었다.

'오래 앉아있는다 = 공부를 많이 한다 = 공부를 잘할 것이다' 공식이다.


그만큼 집중을 하는지, 시간에 비례하여 성적이 오르는지 결과를 따지는 일에는 당장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일단 앉아 있는 게 제일이었다. 우리가 책상 앞에 앉아있다고 공부만 했다거나 100% 집중하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일단 좀이 쑤시더라도 엄마 눈치를 보고 참았다는 부분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글 쓰는 습관에 관하여 논하자면 이 엉덩이 집중론을 꺼내게 된다. 바쁜 현대인에겐 글쓰기를 향한 욕심 위에 자리한 우선순위가 많다. 다 돌아간 세탁기, 밥 달라고 보채는 아이들, 기나긴 출퇴근길, 모임, 데이트, 베란다에 쌓여가는 분리수거, 화장실 청소, 저녁밥... 하루 30분 잠시 틈을 내어 집중하는 일도 어렵다. 엉덩이를 붙이고 글쓰기가 어려운 모든 이에게 나는 내가 애용하는 발바닥 집중론을 제안한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저마다 습관처럼 굳어진 버릇을 하나씩 갖고 있을 텐데 내 글쓰기 버릇은 개중에서도 가장 흔한 축에 속한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절대 놓쳐선 안 돼.'


평범한 일상을 차곡차곡 접어 서랍에 보관해 놓다가 생각날 때 꺼내 쓴다는 하루키 같은 타입이 아니고서야 번쩍이는 단어의 번개가 운 좋게 앞사람을 지나쳐  머리에 내리쳤다면 번개 부스러기라도 더 쓸어 모으려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나는 어쩌면 내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는 단어 조각이 아쉬운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떠오른 순간 그 자리에서 기록해야 한다. 길을 다가, 잠을 자다가(꿈속에서), 수다를 떨다가 아니면 머리를 감다가도 영감이 떠오르면 놓칠세라 무슨 수를 써서든 남긴다. 한 번은 꿈이 너무 흥미로워서 자다가 비몽사몽간에 일어나 손에 잡히는 대로 볼펜(이라고 생각한 막대기)을 쥐고 괴발개발 그리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영수증 뒷면에 심이 부러진 연필로 그린 상형문자만 가득했다. 꿈은 날아갔다.


멍하니 길을 걷다가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혼자서만) 좋은 아이디어라고 호들갑 떠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데 그럴 때면 못이라도 박힌 듯 우뚝 서서 ‘어서 써야 해, 남겨야 해’하며 허둥거린다. 다른 이의 통행에 피해가 가거나 나 혼자 돌부리에 걸려 엎어지지 않도록 서둘러 가장자리나 벽 쪽으로 바짝 비켜선 후 생각난 영감을 급한 대로 내게 보내는 카톡방에 보내 놓거나 가방에서 카페 냅킨과 모나미 볼펜이라도 꺼내 적는다.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가면 찰나의 행운이라도 후다닥 붙잡는 발바닥 집중론이다.


미국의 시인 루스 스톤은 엘리자베스 길버트와의 인터뷰에서 창작의 과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보통 영감이란 녀석은 갑작스레 등장해 온 집안을 휩쓸면서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데 그럴 때면 녀석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온 영감이 몸 안으로 흡수될 수 있도록 당장 연필과 종이를 찾아 루스 또한 미친 여자처럼 달린다. 한 번은 온 집안을 쫓아다니며 도망치려는 녀석의 뒤꽁무니를 냅다 잡아 거꾸로 끌어당겨 거칠게 포옹했다고. 거장그렇게 영감을 얻고 시를 쓴다.


책상 앞에 앉아 각 잡고 긴 글을 쓰는 과정과 다르게 머릿속에서 튀어 오른 생각을 놓치지 않고 캐치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엉덩이로, 발바닥으로 꽉 잡는 것이다. 실제로 한창 집중하다가 이유 없이 발바닥이 뻐근해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나도 모르게 발가락을 잔뜩 웅크려 카펫을 꼬집고 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입술도 잔뜩 모아 앞으로 쭉 내밀고 있다. 붙잡으려는 본능적인 행동인 듯하다.


문득 떠오른 생각을 일단 발바닥으로 잡아두자. 10초만 멈춰서 스마트폰이든, 냅킨이든, 수첩이든 남겨서 반드시 활용해야 한다. 내게 번쩍이는 순간을 선사한 단어는 분명 10초 이상의 문장이 되고 10분 동안 풀어도 부족한 단락으로 나아가 엉덩이를 붙이고 1시간 동안 풀어도 부족한 글로 완성될 것이다. 엉덩이 붙이고 있었다고 동네방네 자랑할 나이는 엄마도 나도 훌쩍 지났지만 쓰는 이에겐 엉덩이 자부심이, 한 편의 글이, 글 쓰는 습관이 남는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의 글쓰기 장비를 소개해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