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이유를 찾는다. J형 인간이든 P형 인간이든, 명분도 없이 움직이는 경우는 희박하다. 일상에서 벗어나 일탈할 때조차 당위성을 찾아 스스로 납득을 해야 실행하곤 한다.
‘나는 왜 여행을 하는가’
원래부터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유독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한 달이었다. 잠깐 쳐지고 지나가는 피로가 아니라 늪에 빠진 사람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허우적거렸다.
‘낯빛이 너무 안 좋은데요’ 무례함을 무릅쓰고 어두워진 혈색을 걱정하는 지인들의 걱정에 일주일 내내 스스로 집안에 가둬 놓고 휴식하려 애썼다. 성격상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탓에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날이 일 년 중 손에 꼽을 정도라 검게 변한 혈색과 부르튼 입술, 뻣뻣한 뒷목은 자초한 상황이었다. 오전 늦게 일어나서 끼니를 챙겨 먹고 스르륵 잠기는 눈꺼풀을 견디지 못해 다시 낮잠을 청하고 나면 그나마 오후를 보낼 수 있는 에너지가 차올랐고, 책상에 앉아 양심상 일하는 척을 하다가, 해 지면 다시 이불속을 파고들었다.
충분히 쉬고 나니 바다가 보고 싶었다. 며칠 동안 내 피부가 되어 버린 얇은 여름용 홑이불을 떨치고 나자 드넓은 바다, 끝없는 수평선, 몽실 구름이 보고 싶었다.
‘피로를 떨치고 새로운 영감을 찾아 떠나보자.’
이번 여행의 이유였다. 기억력이 감퇴한 것인지, 뇌의 기능이 멈춘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적절한 단어를 떠올리는 작업이 불가능했다. 말라버린 영감의 샘물에 새 물줄기를 끌어와야 했다.
일주일 내내 쏟아붓던 폭우가 그쳤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더위가 찾아올 거라는 기상청의 경고성 안내에 문을 열기조차 무서워질 정도지만, 숨이 턱턱 막히는 날씨에도 여행자들은 멈추지 않는다. 시원하게 에어컨을 틀고서 쭉 뻗은 고속도로를 달린다. 오래간만에 나선 여행길이라 고된지도 모르겠다. 빨리 바다가 보고 싶어 몇 개의 휴게소를 그냥 지나치고 시도의 경계를 넘나드는 여정에서 여러 날씨를 만나게 되었다. 경상도에서는 흐린 날씨였는데, 충청도에서는 부슬비가 내리고, 곧 굵어진 빗방울이 쏟아지더니, 강원도에 진입하자 거짓말처럼 맑고 깨끗한 하늘이 우리를 맞이했다.
해안도로를 달리자 언뜻 동남아 휴양지에 놀러 온 것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맑은 하늘에는 며칠 내내 내 뒤통수에 붙어있던 베개와 같은 형상을 한 폭신한 구름이 두둥실 떠 있다. 바깥 풍경의 유혹에 이끌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문을 열자마자 훅 – 밀려 들어오는 뜨거운 공기에 화들짝 놀라 주춤하지만, 영감을 찾으러 온 여행자를 멈출 순 없다.
여름철 해수욕장은 물놀이하는 사람들로 활기찼다. 뜨거운 태양에 아랑곳하지 않고 튜브를 끼고 철썩거리는 파도를 타며 즐거워 보인다. 겁도 없이 뜨겁게 달궈진 모래사장에 발바닥을 대었다가 화들짝 놀랐다.
‘저들은 뜨겁지도 않은 걸까’
잠깐 바닷물에 발이라도 담가 볼까 흔들리던 마음이 증발해 버렸다.
작열하는 태양을 온몸으로 받아주는 바다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흐릿해진 수평선에 바다와 하늘을 구분하는 경계가 사라졌고 시원한 바닷물이 금방이라도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철썩이는 파도, 윤슬, 눈이 시리다. 윤슬은 마치 시간을 따라 흘러가는 빛의 조각이다.
잠시 시원한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고자 강릉에 올 때마다 들르는 동네 카페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쪽이야!’
‘아니야, 저쪽으로 갔어야지.’
순간적으로 짜증 섞인 소리가 나왔고, 별것도 아닌 일 때문에 작은 말싸움이 일어나고 말았다. 차 안의 공기가 눅눅해졌다. 무뚝뚝하게 메뉴를 고르고 뚱하니 자리에 앉아 있다가 금세 나온 메뉴를 말없이 한 입 먹었다. 고소하고 달콤한 흑임자 아이스크림 한 입이 들어가니 분위기는 사르르 풀어진다.
휴게소도 그냥 지나치고 오로지 바다만 보려고 달려온 3시간이었으니 지칠 게 당연했다. 함께 하는 여행에서는 반드시 분위기 전환용 당분이 필요하다. 그리고 쉼도.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다니고, 구경하는 여행도 좋지만 잠시 멈춰서 쉬는 시간도 전혀 아까울 게 없다.
높은 나무 꼭대기에 자잘하게 매달린 나뭇잎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어디에나 나무는 있고, 나뭇잎은 늘 바람에 흔들리지만, 여행지에서 새삼 처음 보는 풍경이라는 듯 쉼 없이 조잘거리는 나뭇잎에 넋을 놓고 만다. 여행지에서는 일상에서 보지 못하던 평범한 사물을 눈치채고, 관찰하고, 주목하게 된다. 낯선 동네에 잠시 앉아 있는 것만으로 내게 여행의 이유는 충분히 충족된다.
때론 내가 너무 아등바등 사는 것 같고, 이렇게 열심히 살아서 뭘 하겠다고 내 몸을 혹사하고, 스스로 스트레스를 주는지 나조차 의문이 들 때가 있지만, 긴 고통의 시간에 반비례하는 짧은 환희의 순간을 기억하는 온몸의 감각이 나를 똑같은 방향으로 이끌고 만다.
원래 여행지마다 절을 찾아가는 일정은 엄마의 여행 스타일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엄마를 닮아가는 모양이다. 강릉시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보현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외줄 타는 곡예사처럼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다 보면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가 감탄스러운 그늘을 만들어 내고, 사이사이 쏟아지듯 들어오는 햇빛에 바다만큼 아름답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세차게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절보다 먼저 사람을 맞이한다.
방문객을 맞이하는 웅장한 문도, 사천왕도 보이지 않는다. 소박한 크기의 문에는 신자들의 소원을 적어 걸어두는 새끼줄이 있을 뿐이다. 대여섯 채의 건물이 있지만 어떤 게 대웅전인지 현판을 읽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큰 차이가 없다. 다른 절에서는 화려함에 압도당하고 둘러싼 산세나 저 멀리 보이는 바다에 넋을 놓게 되지만, 보현사에서는 잔뜩 긴장한 어깨가 절로 풀어지고 두 손이 모아진다.
‘땡그랑’
그때 바람이 불면서 각 처마 끝에 달린 여남은 개의 풍경이 일제히 울려 퍼졌다. 찰나, 행복해졌다. 구슬땀이 흐르지만, 찬찬히, 꼼꼼하게 둘러본다. 흰 고무신에는 다육 식물이 자라고, 깨진 기와는 곡선을 하늘 방향으로 꽂아 연꽃을 닮았다.
매번 잊어버리지만, 여행마다 깨닫는 여행의 이유는 찰나의 행복이었다. 여행지에서도 일상과 다름없는 싸움, 고뇌, 피로, 불행은 존재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찾아오는 찰나의 행복이 여행자들의 발길을 붙잡니다. 찰나(刹那)는 불교에서 극히 짧은 시간을 가리키는 의미로 산스크리트어의 ‘순간’이라는 뜻, '크샤나'라는 단어를 음역 한 용어이다.
'이번 여행의 이유는 뭘까'
매번 다른 이유를 생각해 내지만, 끝나고 보면 내 여행의 이유는 언제나 찰나의 기쁨이었다. 윤슬, 풍경소리, 흑임자 아이스크림은 찰나의 조각이자 그 순간 내가 그 자리에 있었기에 경험할 수 있었던 내 여행의 이유다.
절로 향하는 비탈길 한쪽 작은 나무 그늘 아래 캠핑용 의자를 펴놓고 독서하는 50대 중년의 남성이 보인다. 계곡물이 힘차게 흘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책에 푹 빠진 모습을 보자 나도 어서 동네 책방에서 산 소설책을 읽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남자만 느끼는 찰나의 행복일 테다. 어쩌면 내 삶도, 나의 여행도 짧지만, 분명한 순간들을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닐까. 그 순간들을 더 자주,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