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납골당, 봉안당이라 일컫는 곳 화성시 추모공원에 채란이가 있다. 경기도 화성시에는 외할머니와 우리의 집이 있었다. 아빠의 사업 부도로 갈 곳을 잃은 우리 자매가 맡겨지며 채란이는 중학생까지, 나는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 곳에서 지냈다. 겨울이면 난방을 가끔씩만 트는 탓에 집 안에서 늘 점퍼를 입고 있어야 했고, 욕실이 웃풍으로 가득해 씻으면서도 온 몸에 닭살이 돋았다. 지붕 위 철판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무서워 그런 날이면 두 자매가 꼭 끌어 안고 잠이 들었다. 작은 마당엔 긴 빨랫줄 있었는데 할머니가 속옷 따위를 널어둘 때면 열린 대문 틈으로 동네 친구들이 볼까 싶어 서둘러 걷어 들어오곤 했다. 돌이켜보면 그래도 그 때가 더 좋았던 순간들이 있다. 우리에게는 할머니가 살아계시던 그 때가 그랬다.
대구에서 대학교를 다니던 채란이가 방학이나 연휴에 맞추어 우리 집에 올라와 지낼 때면 우린 자주 그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난 엄마랑 할머니가 다른 점을 알아냈어.” 흥미진진한 이야기마냥 내가 물꼬를 트자 채란이가 몹시 궁금해하며 이어질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엄마는 우리가 아프다고 하면 본인도 아팠다고 하지만, 할머니는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 봤잖아.” 채란이는 “정답!” 이라며 우리는 이 서글픈 이야기조차 우스갯소리로 여겼다. 우리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종종 그리워했다. 때문에 대구에서 장례를 치른 뒤 채란이를 할머니 곁에 두어야겠다고 결정하기까지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렇게 대구에서 차로 올라오는 내내 채란이의 영정사진을 끌어안고 되뇌며 말을 걸었다. ‘할머니한테 먼저 가 있어. 언니가 데려다줄게. 언니는 바로 못 따라 가. 좀 더 나중에 할머니처럼 늙은 모습으로 너한테 가도 알아봐 줄거지?’
그전까지는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영정사진이나 봉안함 앞에 서서 혼잣말한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추모공원과 차로 3-40분 거리의 교육 일정이 예정되어 있을 때면 나는 어김없이 볼일을 마치고 채란이에게로 간다. “채란아, 언니왔어.” 채란이에게 인사를 하고, 그 아이를 마음껏 그리워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 나온다. “언니가 더 자주 못 와서 미안해. 언니가 다 미안해.” 그렇게 한 시간이 훌쩍 지날 때도 있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 가까워지기에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인사를 전하고 돌아오는 일이 이젠 제법 익숙하다.
어느 날은 할머니에게 꼭 전할 말이 있어 다이어리 뒷 장을 북 찢어 편지를 써두고 돌아왔다. “채란이 잘 지켜줘요. 너무 슬프고 괴롭지만 그래도 전 더 열심히 살아볼게요.” 자신의 몫까지 행복하게 살아 달라는 채란이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나는 또 살아내겠다고 약속을 하고 다짐을 한다. 하나뿐인 동생은 여전히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