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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혜 Jul 30. 2020

허황된 대박은 쪽박을 낳는다

두 번째 이야기

108평 집에 살다가 허름한 5층짜리 12평 남짓의 주공아파트에 월세로 들어갔다. 막일의 현장을 오가는 아빠와 엄마, 나 그리고 180cm에 90kg는 거뜬히 넘을듯한 거구의 동생과 내 친구까지 네, 다섯 식구가 복작거리며 살기에는 집이 너무나 작았다. 내 친구는 일찍이 아빠가 돌아가셔서 가정형편이 넉넉지 못했다. 한데 자기 엄마에게 아저씨까지 생기자 사춘기에 마음 붙일 곳이 없어 하숙 생활을 힘들어하기에 땔거리도 없는 우리 집이었지만 함께 살자고 고 그래서 우리랑 함께 살게 되었다. 친구는 종종 밖으로 기어나와 인사를 건네는 바퀴벌레에는 강했지만 꼽등이에게는 몹시 약했다. 꼽등이가 퐁당하고 뛰어나오면 기겁을 하고 뛰쳐올랐다. 이거 무슨 중간에서 내가 누가 멀리 높이 뛰나 심판이라도 봐줘야 할 판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친구와 나는 같이 집 근처에 있는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은 잘못된 듯했다. 첫째는 그 집이 동네에서 가장 손님이 많은 고깃집이었고, 둘째는 그릇 재질이 모두 사기그릇이여서 쟁반 무게가 삶의 무게와 같았으며, 셋째기본상으로 쟁반이 세 번 나간다는 거였다. 그때는 웨건도 없었고, 24개의 테이블이 모두 좌식이었으며, 상을 치우기가 무섭게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결국 친구는 이틀 만에 잠수를 탔고 나는 오기로, 손님이 먹다 남긴 소주의 힘으로 버티며 일했다. 그 덕에 고기많이 먹고 용돈과 팁받았으니  보다 득이 많았다.


웃긴 건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찬모 이모들과 엄마를 소개시켜 친구로 맺어줬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나도 끼여서 놀기도 했다. 그녀들의 우정은 아직도 이어져오고 있어 좋다. 홀서빙 이모가 술을 마실 때마다 나에게 누누이 말하길 "여자는 말이다. 항상 빤스를 잘 벗으야 돼! 특히 시집갈 놈한테는 말이다! 으잉!" 이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이러고 사는 거 보니까 아마도 이모 말을 콧구녕으로 들었나 보다. 남편 덕 보고 살기가 이번 생은 아마 글렀지 싶다.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대학생 때는 조개구이집, 호프집, PC방, 옷가게, 학생 과외, 휴양림 안내원, 실험실 연구원 등의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PC방을 제외하곤 모두 적성에 잘 맞았다. 내가 대학에 진학하고 2년 뒤 동생도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서 장학금 수령 여부와 관계없이 나는 계속해서 학자금 대출을 받았었고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페이 좋은 성인오락실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환전하는 오빠가 계단을 싱~ 스치듯 지나간다. 오늘도 비누거품 잔향이 무심하게 퍼진다. 가끔씩 환전실에서 오락실로 내려오면 멍 때리고 어딘가를 응시하다가 나를 쳐다본다. 내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면 시선을 피한다. 테이블 위에 있는 내 폰을 가져가더니 자기 번호를 찍고서 다시 툭 던져준다. 

(이거 뭐 하는 거지?썸각인가?얼라리? 기다려도 전화가 안오네? 메시지 안 온다. 먼저 문자를 보냈더니 단답형 답문자 끝이다. 이거 뭐지?)


언놈 "야! 3 행님이 라면 하나 끓여 오란다"

보혜 "아! 네!"

(잠시 후)

언놈 "야! 행님이 이리 맛없는 라면 첨이란다!"


(참나 -_- 라면은 기계가 끓이는데, 똑같은 물에! 똑같은 프에! 신경 써서 달구 새끼 한알도 풀어 넣어줬구만 돌아오는 게 라면 맛이 똥 맛이라니! 환전하는 오빠 왜 저래? 이름은 뭐래? 나이는?

무슨 비밀조직인가? 양아치들은 똑바로 아는 게 없네. 이번엔 깡패오빠한테 물어야지!!)


(쫄랭쫄랭!! 인규행 ^-^♡질문 하나만 하께유!)

보혜 "인규행님! 밤에 환전해주는 사람이요~ 

         이름이 뭐예요?"

깡패 "승규행님?"

보혜 "아~ 망구가 아니라 승규였네요!

         그럼 나이는요?"

깡패 "행님? 서른이다이가"

보혜 "예? 저랑 5살 차이 아니 8살 차이였어요?

         띠로리~ 맙소사!"


(망구오빠가 차 안에 올라 타 최대한 다부지게!!)

"짝사랑인지 썸인지 랑인지 우리 사이가 뭔지 해 주세요! 아님 오늘부터 1일거예요!"

그렇게 나의 강요로 카운팅 되었다. 우리의 1일이.

22살과 30살의 2008년 추운 어느 겨울밤이었다.


남편은 당시 유흥업소를 상대로 음료 유통사업을 해오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돈을 쉽게 또 많이 벌었다. 처음엔 돈이 있는 사람인 줄 몰랐다. 그저 비누향과 함께 일관된 무뚝뚝함에 렸는데 졸졸 쫓아다니다 보니 차가 번쩍번쩍하고 현금이 얼마나 많지 항상 지갑이 빵빵해서 닫히지가 않았다. 어쩌다 대어를 낚은 기분이었다. 엄마에게 뺨까지 얻어맞아가며 집에서 나가 남편과의 동거를 하기 시작했다. 오 하나님! 이제는 고물이 되어 덜컹거리는 그때의 멋진 차를 아직도 타고 다니게 해주시어 감복해 외칩니다! 아멘!


나는 그때 대학생이었고 비록 가세는 기울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집에서 나에게 대 하는 바가 있었기에 나이 많고, 고졸학력에, 마땅찮은 직업의 남자를 좋다고 따라다니는 내가 제정신으로 보일 리 만무했다. 모두가 돌아가며 한 마디씩 했고 그에 보란 듯이 나는 임신을 해버렸다. 낙태금지법이 한창 떠들썩할 때라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아빠와 엄마는 눈물을 훔치는데 신부는 뭐가 그리 좋은지 결혼식을 진행하는  내내 싱글벙글거렸다. 마치 죽을 날 받아놓고 죽기  못 웃은 웃음보따리를 몽땅 찾아와 풀어놓는듯 신나서 헤벌쭉거렸다. 


아기는 연을 맺어주기 위해 왔었나 보다. 결혼 후 자연 유산되었다. 머지않아 난 다시 임신했고 그때 낳은 아기가 지금의 아들 지후다. 그때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나에게 아이는 아마 없었을 거다. 왜냐면 그 뒤 3번의 임신을 더 했지만 안타깝게도 번다 임신중절술을 받아야만 했다. 9년 전부터 이어오고 있는 정신과 약물 치료 때문에 산부인과에서는 임신 유지가 힘들다고 했다. 또 여건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낳음 어떻게든 기를 수 있었을 텐데 늘 동생을 찾는 지후를 보면 마음이 아프고 무겁다.


어떤 사람은 지후를 임신하고 지후를 낳으면서 본격적으로 가정경제가 힘들어졌기 때문에 지후가 복이 없어 그런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남편이 불법 스포츠토토를 해서 사업체와 그간 모은 돈을 다 날리고 우리 가족이 함께 암흑의 나락으로 떨어진 걸 왜 아이 복을 운운하며 탓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따지면 내 복이 더 지지리 궁상이다. 결혼 늦게 하라고 그렇게! 할머니가 어려서부터 입이 닳도록 말했는데 일찍 한 팔자 땜을 하고 있거나.


어쨌든 먹고살기 위해 여러 아르바이트를 했듯이 이번에도 먹고살기 위해 나는 병원코디네이터, 화장품 방문판매, 백화점 판매원, 실크 검단원, 사무경리, 보험&카드 영업, 학습지 교사,.. 등 별 가지 직업에 온 열정을 다 쏟아부어보았다. 여러 직업군에서 만난 여러 가지 인간 군상 속에서 찾은 공통된 법칙은 성공한 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꾸준함은 있어도 허황됨은 없다는 것이다. 내 인생에 있어 허황됨은 결혼뿐이다. 결혼이 대박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허황된 대박은 결국 쪽박만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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