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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혜 Jul 29. 2020

금수저에서 흙수저의 나락으로

첫 번째 이야기

나는 삼천포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서울특별시에 미안하지만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만해도 삼천포가 대한민국 수도인 줄 알았다. 아마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더라면 또는 우리 집이 망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한국의 공주쯤은 될 거라고 망상에 빠져서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저나 금수저를 닳도록 쪽쪽 빨아본 적도 없는데 어느 날 흙수저로 변해있는 이 현실이 정말 안타깝다. 여기서 잠깐! “삼천포가 어디죠?”라고 물으신다면, 맞다. 잘 나가다가 빠진다는 삼천포. 바로 그 삼천포의 금수저가 바로 나 ‘김보혜’였다. 아빠와 엄마는 맞선 후 13일 만에 결혼했다. 가난한 살림에 질렸던 외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이 “아이고, 그 집에 시집보내모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아도 된다. 3대는 놀고먹어도 살만치 억수로 부잣집이다이” 라고 하는 소리에 엄마를 얼른 시집보내 버렸다고 한다. 아빠는 장남이고 엄마는 장녀였으니 나는 자연스레 한 집안의 첫아기가 되었다. 경사도 그런 경사가 없었다. 세상의 이쁨이란 이쁨은 다 내 차지었다. 할아버지는 거버 이유식을 사다 먹인다는 핑계로 나를 품에서 내려놓지 않으셨다. 할머니와 삼촌 그리고 고모 눈엔 그저 이쁜 내 손주 내 조카였다.


처음부터 우리 집이 잘살았던 건 아니었다. 할머니가 삼천포 팔포라는 곳에서 생선을 떼어다 파는 것으로 시작해 나중에 건어물 공장을 짓고 점차 돈을 번 거로 알고 있다. 당시 우리 집은 삼천포에서 처음으로 건어물 공장을 시작했으므로 꽤 잘 나갔다. 우리 집이 수협에 예치한 돈을 빼면 수협이 넘어간다는 소리가 있을 만큼 부자였단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친구들이 나를 갑부집 딸이라 불렀고, 중학교에 다닐 때는 친구들이 우리 집이 넓고 좋다며 부러워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 무용 대회를 나갈 때면 할머니가 버스는 불편하다며 비행기 표를 끊어주셨다. 그리고 여행이나 대회로 내가 타지 숙소에 머무를 일이 생길 때면 다른 친구들이 다 같이 한방을 쓸 때 나는 독방을 썼었다. 그뿐만 아니라 갖고 싶은 걸 말하면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가 도깨비방망이로 뚝딱 휘두르듯 다 사줬었다.


어릴 때 좀 산다는 집 애들은 이쁘고 싹퉁바가지가 없던데, 나는 그에 반해 나는 못 생긴데다 소심하고 또 소심했다. 아니 집안 똑똑이 나가 벅수라고 집안에서는 똑똑한 척 재잘재잘 말도 잘하면서 밖에 나가면 멍텅구리가 되었다. 얼마나 멍텅구리였는지 밖에 나가면 말을 할 줄을 몰랐다. 한 번은 유치원 때 미끄럼틀을 거꾸로 오르다 떨어져서 머리가 찢어졌다. 다른 친구들 같았으면 아마 크게 울거나 선생님을 찾았을 것인데, 나는 조용히 구석에 가서 숨죽여 흐느꼈다. 피를 줄줄 흘리면서 말이다. 그때 어떤 친구가 “선생님! 보혜 머리에서 피나요!”라고 말해 준 덕분에 병원에 가서 응급 처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쁘지도 않았다. 생기다 만 쌍꺼풀은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알 수 없게 하였고, 작은 눈은 어딜 가서 ‘이쁘다’ 대신 ‘귀엽다’ 소리를 듣게 했다. 엄마는 항상 잘생긴 동생 손을 잡고 다녔다. 그럼 나는? 나는 자연스레 아빠의 몫이었다. 말이 좋아 아빠 몫이지 아빠는 자유 방임주의자이므로 나는 거의 방목되었다.

성격이나 외모가 부잣집 여주인공 캐릭터와 맞지 않아서일까. 평생 갑부집 딸이라 불리며 살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나는 갑부집 딸이란 별명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많은 사람이 경제적 타격을 입었던 IMF 때도 우리 집은 끄떡없던 우리 집이 타격을 입은 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였다. 부유하게 자라서 돈을 몰랐던 아빠와 삼촌은 집구석을 말아먹기에 최적화된 인물들이었다. 눈 뜨고 코 베인다고 공장장이 날름 코를 베어 가는 줄도 모르고 앉았던 두 사람은 그나마 남은 돈을 가지고 또 각개전투로 이 사업 저 사업 찔러대기 시작했다. 그러다 후루룩 무너져 내린 덕분에 ‘부자 3대 가더라’가 아닌 ‘부자 망하고 3년 가더라’를 몸소 보여주셨다. 그렇게 금수저에서 흙수저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헬리콥터 맘이었던 우리 엄마는 초등학교 때부터 사교육에 열을 올려 나를 공부시켰다. 그냥 돈을 갖다 바른 덕분에 성적이 나쁠 리 없었던 나는 고등학교를 삼천포에서 진주로 진학할 수 있었다. 하숙하길 희망했지만, 엄마는 큰 이모 집에서 살게 하였다. 타지에서 생활하는 건 적응하기 힘들었다. 이모 집이었지만 편하지도 않았다. 남몰래 서러워 울 때도 많았다. 집안 형편이 힘들어졌음을 고1부터 체감했는데, 아직도 기억난다. 처음으로 엄마가 시장에서 사준 청치마를 부여잡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내 몸에 시장에서 산 옷을 걸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기 때문이다. 눈물 콧물 다 짜내고 옷을 입었는데 웬걸? 너무 편하다. 역시 옷은 시장표가 최고라는 걸 그때 알았다. 또 하루는 엄마가 공부하면서 먹으라며 사준 사탕 한 봉지가 왜 그토록 슬프던지. 엄마가 나를 응원하는 물질의 표현이 고작 사탕 한 봉지가 최선이라는 것에 화가 났다. 나는 사탕을 먹지 않고 서랍 속에 넣었다. 여름이 되고 내 기분처럼 눅진해져 녹아 끈적하게 눌어붙어버린 사탕을 하나 뜯어먹었다. 웬걸? 의외로 맛있어서 사탕 껍질까지 벅벅 앞니로 긁어가며 핥아먹었다. 그렇게 나는 흙수저의 삶에 적응되어 가고 있었다.


고3이 되고 엄마가 진주로 올라왔다. 이모가 재개발 지역에 사둔 아파트에 엄마랑 월세로 들어가 살기로 한 것이다. 12평 남짓의 주공아파트. 엘리베이터도 없는 이 낮고 허름한 아파트에 사람들이 복작복작 사는 게 너무도 신기해 보였다. 처음엔 집이 너무 작아서 개집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심심하면 꼽등이와 바퀴벌레가 튀어나오는 집이었지만 이모 집을 벗어나 엄마랑 같이 살 수 있어서 마냥 좋았다. 그러나 땔거리가 없어 엄마가 식당에서 일하고 남은 음식을 싸 오면 그걸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나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몸무게도 얼마 안 나가던 그때 고깃집에서 무거운 쟁반을 들고 온종일 일하고 나면 완전 녹초가 되었다. 발바닥이 아파서 걷지를 못할 정도였다. 그래도 돈을 벌어야 했으니 사장님 몰래 홀서빙 이모와 함께 손님들이 남기고 간 소주를 한 잔씩 마셔가며 일했다. 역시 술의 힘은 최고다. 노동자들의 한 손에는 왜 항상 소주병이 들려져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사장님은 내가 얼마 못 가 일을 그만둘 줄 알았는데 제법 버티는 걸 보고 아르바이트비 외에 가뭄에 단비 같은 용돈을 5만 원씩 지갑에 척척 찔러 넣어주시기도 했다.


나도 경제적으로 힘들었을 때 하루를 살아내려 술로 나를 채웠던 적이 있다. 엄마도 그때 그랬다. 술을 하나도 못 하는 엄마가 취해오는 날이 잦았다. 옷장이 없어 행거에 뒤죽박죽 걸린 옷가지들 사이로 풀썩 몸을 가누지 못해 처박히는 엄마를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게다가 그때 두 살 터울 남동생은 우울증이 심하게 왔는지 손목 자해를 했더랬다. 며칠을 숨기며 혼자 곪아가는 깊게 파인 손목의 상처를 끙끙 앓다가 내게 보여주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사람들은 금수저가 되기를 꿈꾼다. 나는 태어날 때는 금수저였다. 삼천포 금수저. 어쩌다 흙수저의 나락으로 추락해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받고 자란 사랑이 많아서인지 항상 밝고 씩씩했다. 그때의 어려움은 그다지 나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슬기롭게 극복해 나갔다. 돌이켜보면 스스로가 대견할 만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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