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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혜 Jul 30. 2020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네 번째 이야기

옛날 싸이월드 일기장을 보면 욕지껄이 밖엔 없다. 그래도 멀쩡한 글은 통통 튀는 게 제법 슈팅스타 같은 매력이 있기도한데 흉내 낼 수 없어 아쉽다. 그때 핸드폰이 끊기면 인터넷으로 연락을 취했다. 당시 밀린 인터넷 요금도 해결한 지가 사실 불과 얼마 안 됐으니 그간 캐피털, 카드사, 공과금을 비롯해 얼마나 다양한 장르와 사람들로부터 온갖 독촉과 압류에 시달렸는지 말로 어떻게 다 표현할까 싶다. 물론 아직 진행중인 것도 있지만.


남편도 남편이었다. 전화를 받으면 되지 피한다고 상책인 것도 아닌데 일방적으로 전화는 받지 않고 집만 비우면 다인가?  아기랑 스물다섯 살인 내가 오는 연락은 안 받는다 쳐도 찾아오는 사람은 무슨 수로 막냐 이거지. 집에 없는 척을 하라고? 애기가 없는 척이 돼야 말이지. 이 무슨 말이야 소야? 어느 날은 정장 입은 건장한 남자 두 명이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씨!! ○○○씨 댁 아닙니까??"

"네, 맞는데요."

"**캐피털에서 왔는데요. ○○○씨 안 계십니까?"

"없는데요. 왜 그러시는데요?"

...(중략)...

"저희도 돈을 받는 입장이지 않습니까?"

"한테 말하지 말고 그 한테 가서 직접 말하라고! 내가 도박했냐고! 내가 당신들 돈 갖다 썼어? 나한테 와서 지랄이냐고오!"

"흥분하지 마시고요"

"돈 될 거 있나 어디 들어와 보세요! 이미 내 몸에 있는 금 붙이도 전당포에 갖다 넘기고 못 찾아온 놈이니까! 받을 수 있음 재주껏 받아가시라고!"


돈과 관련된 일이나 대화라면 나는 한껏 가시 세운 고슴도치가 되거나 백만볼트 피카츄 삐까삐까삐-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이 그저 좋아 죽던 나는 아들 지후 돌반지가 어느 날 다 사라졌는데 남편 말대로 집에 도둑이 들었다 믿었으며(이건 아직도 발뺌 중) 돈이 없어 힘들어하길래 할아버지 유품을 녹여서 차고 있던 금붙이들과 결혼반지를 갖다 팔아 써라며 다 내주었다. 남편은 그걸 전당포에 가져갔는데, 금방 찾으러 올 거라며 주인이 돈을 200만 원 이상 필요하면 더 준다는 말에도 그냥 딱 50만 원만 받고 나왔단다. 이런~


불이 안 들어온다. TV도 안 켜진다. 정전이다! 아니 옆집은 시끄럽다. 알아보니 전기가 끊긴 거였다. 낮이라 다행이긴 한데 아무것도 모르고 빠당 거리는 아가야 눈을 쳐다보니 괜히 서러워 눈물이 났다. 그때 TV를 아직 알지 못해서. 떼쓰지 않아서. 집에 전기가 나갔단 걸 네가 알아채지 못해서 다행었어. 고마워 나의 아가 지후 ' -'.....♡


우리 빌라는 동네 발달이 덜 된 곳이라 아직 도시가스 공급이 안된다. 그래서 사설 업체에서 공급을 맡아 LPG가스를 이용하고 있는데, 아기가 갓난쟁이일 때와 그전에 밀렸던 요금까지 있으니 온수만 이용해도 가스비가 계속 불어나갔다. 우리 집 한 가구가 밀린 가스비 때문에 빌라 전체 가스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가스를 끊으러 업체 사장님이 들렀다. 우리 집을 찾았다.


나는 또 가시를 곧게 세우고 맞았다. 그때 겨울 내 보일러를 한 번도 틀지 않아 차가운 돌마루 바닥을 추워서 발갛게 튼 볼을 하고서 뽈뽈거리며 지후가 나를 찾아 밖으로 기어 나왔다. 한창 열 올리며 밀린 가스비 얘기를 하던 사장님은 지후를 보더니 자기도 딱 그만한 손주가 있는데 젊은데 안됐다며 열심히 살아서 밀린 가스비는 조금씩 갚아라는 말씀을 해주고 가셨다. 얼려진 가시처럼 차갑고 아픈 말들만 무성했던 그때에 사장님의 한마디는 독기로 똘똘 뭉쳐서 바들바들 떨기만 하던 나를 안도감 속에 녹아 주저앉게 만들었다.


모든걸 다 잃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탈탈 털어 ‘성실’이란 한 단어밖에 나올게 없던 남편은 낮에는 농산물 도매상에서 새벽과 저녁으로는 농지로 비닐하우스를 지으러 다녔다. 이젠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성실히 일하는 모습에 우리의 형편도 나아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알량한 내 믿음에 불과했을 뿐, 남편은 본전 생각에 일하며 수금한 돈까지 몽땅 도박에 가져다 썼고 월급은 커녕 일을 할수록 갚아나가야 할 빚만 더 늘어갔다. 살 길이 정말이지 보이지가  않았다. 고생이 이젠 끝났다 생각한 순간, 끝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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