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흔적 Jun 14. 2023

로컬의 맛이 살아 숨 쉬는 채소시장 예찬기


어쩌다 시장을 찾게 된 건지 모르겠다. 잃어버린 것들을 찾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새로운 보물을 발견하고 싶었던 걸까. 이유는 몰라도 직감은 있었다. 어지럽고 화려한 것들로 가득 찬 세상에 요새처럼 숨어있을 것 같은 예감. 왠지 모르게 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로 가득할 같았다. 그게 사과든, 땅콩이든, 비닐 포장 벗은 채소의 싱싱함이든.


깔끔하게 잘 정돈된 마트나 관광지화된 시장은 내가 찾는 매력이 아니었다. 맛집이라며 줄이 늘어선 디저트 가게 앞에서도 나의 심장은 뛰지 않았다. 로컬 맛집이라는데 로컬의 맛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함은 무언가를 더할수록 그 색이 옅어지는 듯했다. 




장이 서던 날


작년 10월 경북 상주에 사시는 이모댁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모와 이모부가 사시는 시골집은 앞에 마당과 텃밭이 있는 조그마한 단층집이다. 마트가 멀리 있어 가는 길에 장을 볼 참이었는데 마침 장이 서는 날이라며 "국산 땅콩" 사야겠다는 엄마의 말에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은 크지 않았지만 나를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북적거리는 분위기, 정감 있게 말을 건네는 할머니들, 생김새와 빛깔부터 다른 지역 채소들까지. 나를 둘러싼 시장의 기운에 살랑거리는 가을바람이 더해지니 모든 것이 예뻐 보였다.




잠깐의 경험이었지만 강렬했다. 땅콩을 면주머니에 담아 사고 조선호박의 포장을 벗겨 맨손으로 집어드는 순간들이 내 안에 깊게 들어왔다. 용기내 챌린지는 여러번 해봤지만 지난 경험과는 또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렇게 내 안에 은은하게 남아있던 좋은 기억은 지난 5월 제천으로 가족 여행을 떠날 때 스멀스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제천 오일장


상주 시장이 우연한 만남이었다면 제천 오일장은 계획적이었다. 자연친화적인 곳에서 아이와 함께 여행하고픈 마음에 제천에 숙소를 예약하고 갈만한 곳을 찾아보던 중 마침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첫날에 오일장이 선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일장에 가보고 싶어도 날짜를 맞추기가 어려워 포기한 적이 많았는데 이번엔 모든 것이 퍼즐 맞추듯 딱 맞아떨어졌다.




오일장이니 규모가 크진 않을 거란 생각으로 들어선 시장은 내게 거대 쇼핑몰이었다. 큰 도로를 중간에 두고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상점들의 모습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아 내가 제대로 찾아왔구나. 빨리 둘러보고 싶은 마음에 몸이 들썩거렸다. 조금 더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을 땐 설렘과 기쁨이 배가 되었다. 여기가 진짜구나. 베개나 이불 같은 생활용품을 파는 작은 상점들을 옆에 두고 걸어가는데 출처 불분명의 향수가 느껴졌다. 어릴 적 엄마 손 잡고 시장에 갔던 기억인지 아니면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는데도 느끼는 환상인지 알 수 없었다. 가오픈 신상 카페에 들어섰을 때 실망이 아닌 예상외의 감각에 놀랐던 그 짜릿함을 이제 나는 시장에서 느끼기 시작했다. 여기가 나의 '리틀 포레스트'고 '마담 푸르스트의 정원'이었다.




없는 것 없이 다 있는 만물상이었다. 예전엔 정말 이곳이 전부이고 유일했겠지. 이 날만을 기다렸겠지. 그리고 충분했겠지. 그러고 보니, 여기서 밥 한 끼의 재료들을 모두 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숙소도 주변에 식당이 별로 없는 곳이라 저녁거리와 내일 아침거리 장을 보면 딱일 것 같았다.




밤도 사고 수박도 사고 메밀 전도 샀다. 모두 가져간 용기에 담았다. 뿌듯함을 넘어서는 쾌감이었다. 시장에 매력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무포장으로 구매할 수 있는 자유로움에 있었다. 마트의 채소들은 미리 비닐이나 플라스틱에 포장되어 용기를 내고 싶어도 낼 수가 없다.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어떤 노력의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는 재료들의 살아있는 생생함을 눈으로 보고 만지고 쓰레기 없이 담아갈 수 있었다. 이보다 더 무얼 바라야 하지?


한식당에서 자주 보던 반찬 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채소 절임이 있었다. 식당 직원분께 "이건 뭐예요?"라고 물어서 이름을 들어도 너무 낯설어 몇 번이고 잊어버렸던 그 이름. 궁채였다. 궁채가 절여지기 전 생생한 줄기의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뭔지도 모르고 먹었던 기억만 싸였을 뿐이다. 그런데 마른 궁채가 다발로 턱 하니 올려져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선 이렇게 쉽게 볼 수 있는 거라니 믿기지 않았다. "한 다발 주세요!" 지퍼백에 담았다.


(새 지퍼백을 사지 않는다. 가공식품을 사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지퍼백을 씻고 말려 사용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투명 지퍼백은 당근 거래, 아이 어린이집 등 여러 루트를 통해서 내 손에 들어온다. 그러면 그것 역시 구멍이 뚫릴 때까지 무한 재사용한다.)




숙소에 들어와 우리만의 저녁을 즐겼다. 각자 먹고 싶은 식재료와 음식을 사 와서 요리를 하니 소박하지만 부족할 것 없는 한 상이 차려졌다. 남편은 용기에 담아 온 통닭과 골뱅이를 먹었고 나는 배추메밀 전과 궁채를 먹었다. 밤도 쪄서 간식으로 먹고 떡과 과일도 풍족하게 먹었다. 


몇 년 전의 나였다면 이런 소박한 식사에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이기에 자랑할 만큼 특별한 것을 먹어야 직성이 풀리던 나였다. 그런데 신기한 이렇게 먹어도 모자라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욕심을 내려놓았기 때문이 아니다. 이젠 내게 이게 더 특별하기 때문이다. 이 안에 담긴 그 모든 것들이 보물 같기 때문이다.




전주 도깨비 시장


이번엔 아주 본격적이었다. 검색해도 쉽사리 나오지 않는 로컬 시장을 찾아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서 헤매다가 찾은 유레카. 매일 새벽 5시에 문을 열어 아침 8시에 도깨비처럼 사라지는 도깨비 시장이었다. 게다가 주변이 나무와 풀로 가득한 개천가 산책로에서 열린다니. 여기 뭐 판타지 소설이야?! 2박 3일의 짧은 여정 동안 잠옷 바람에 이틀 연속 판타지 소설 속으로 빠져들어간 도깨비 시장 후기다.




잠자리가 바뀌어서인지 새벽 6시부터 일어나 방방거리는 41개월 에코힙쟁이(제 아들입니다.) 덕분에 알람 없이도 여유롭게 시장에 갈 수 있었다. 다리를 건너며 저 멀리 시끌시끌한 시장의 모습이 보이는데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건 찐이야!!" 어떤 오픈런이 이보다 더 내게 가치 있고 힙할 수 있을까. 로컬힙이 무더기로 내게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신상백보다 빛나는 갓 따온 신상 로컬 채소들로 가득한 도깨비 시장. 비닐에 싸여 곧게 자란 애호박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모습대로 개성 만점 울퉁불퉁한 호박을 보는데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여태껏 본래의 모습은 모르고 먹었던 죽순의 겉껍질은 얼마나 신비롭고 로우하던지. 소쿠리에 담긴 쑥부쟁이와 산고사리는 아는 사람만 알아보는 희귀템처럼 영롱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마늘을 잘라주고 땅콩을 볶아서 파는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포장을 마친 마트의 채소들은 조용하고 단정하지만, 이곳의 채소들은 시끄럽고 분주했다. 모든 것이 즉석이었다. 햇, 갓, 토종의 채소들이 개성을 뿜어내며 북적거리는 시장을 채우고 있었고 그 안에 사고파는 사람들 역시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듯했다.




고귀한 것들의 세계에 이제 막 입문한 초보 로컬 안내자는 모든 게 신기하고 놀라웠다. 처음 들어보는 먹우가 사실은 머위를 뜻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토종 완두콩은 진한 초록색이 아닌 연한 연두색을 띤다는 것도 시장 할머니에게서 배웠다. 





본격 제로웨이스트 장보기


이제 가슴속에 품고 있던 비닐과 에코백들이 고개를 들 시간이었다. 첫날은 숙소에서 간단히 아침으로 먹을 감자와 고구마를 사고 둘째 날은 집에 돌아가는 날이라 맘먹고 장을 보았다. 목표는 단 하나. 비닐 한 장 쓰지 않는 것이었다.




엄마가 산 고추와 토마토, 내가 산 완두콩과 땅콩과 앵두, 함께 나누어먹을 고구마. 흥분을 가라앉히고 꼭 필요하고 잘 먹을 수 있는 것만 사려고 노력했다. 절제의 미가 필요한 순간이었지만 쉽지는 않았다.




엄마가 용기내는 모습, 상인분들이 채소를 담아주는 모습을 찍었다. 언제나 용기낸 후 결과물만 찍었었는데 이렇게 생생한 현장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고 보면 용기내 챌린지는 판매자와 소비자가 함께 완성하는 협동의 하모니가 아닐까. 어느 한쪽이 거절하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고 양손이 마주쳐야만 나는 명쾌한 박수소리 같은 것.




그 어떤 콘셉트도 마케팅도 없지만 오랫동안 약속한 듯 그 시간 그 자리에 나오는 사람들이 이어오고 있는 에브리데이 로컬 팝업 플리마켓 <도깨비 시장>. 떠나기가 아쉬웠다. 이 귀한 모든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어주기를 바랄 뿐.


나의 로컬 채소시장 예찬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건과 논비건의 가족 채식 외식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