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처음으로 사줬던 미술도구는 밀랍으로 만든 스토크마 사각 8색 크레용이었다. 돌 전후쯤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허니스틱 밀랍 천연물감을 사줬는데 발색이 너무 연하고 아이가 너무 어려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다 쓴 크레용을 녹여 다시 만든 리크레용도 사줘 봤고 세 살 이후에는 크레용 선물을 너무 많이 받아 딱히 따로 살 필요가 없었다.
미술놀이라고 하기엔 거창하고 영유아의 발달에 좋은 감각놀이 수준의 놀이들을 많이 했는데 아이 피부에 닿는 거다 보니 비싸더라도 되도록 천연 제품을 구매했다. 하지만 여기엔 맹점이 있다. 많은 엄마들이 공감하겠지만 아이가 커가면서 급속도로 무감각해진다. 대충 이케아도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고, 구강기도 끝난 마당에 다이소도 가성비가 좋은 것 같고 뭐 그런 심리.
4살 때 잠깐 미술 학원을 보냈다. 아이에게 조기교육을 시키겠다는 큰 꿈 따위는 없었고 넘쳐나는 호기심을 부모가 셀프로 채워주기 힘에 부쳐서 보냈다. 4살이 하는 미술 수업은 그림보다는 만들기 위주였다. 다양한 재료로 만들기 놀이를 했는데 또래 친구들과 소그룹으로 수업을 하니 아이는 즐거워했다.
하지만 난 심난했다. 미술 재료로 스티로폼과 플라스틱이 너무 자주 등장했다. 일회용품을 쓰지 않기 위해 배달 음식도 안먹는 우리 집인데 아이의 한 시간 남짓 체험을 위해 그 재료들이 반드시 필요한 걸까. 재활용품을 이용해도 얼마든지 창의적을 수 있을 텐데.
게다가 아이가 만든 작품의 유효기간은 매우 짧았다. 집에 가져와 전시해 두거나 가지고 놀지만 일주일쯤 지나면 어딘가에 처박혀 버림을 받았다. 놀다가 부서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너무 아까웠다. 쓰레기 때문에 미술 학원을 그만두어야 하는 걸까 고민했다. 미술학원 본사에 건의해 보기도 했는데 정해져있는 커리큘럼이라는 답을 받았다. 그러던 차에 새로운 일을 시작해 아이를 시간 맞춰 학원에 데려다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겸사겸사 타이밍 좋게(?) 미술 학원을 그만뒀다.
아직 5살인 아이에게 반드시 거창한 미술도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술에 재능이 있는 8살 조카는 아무도 그림을 그리라고 시킨 적도 없고 미술 도구도 제공해주지 않았는데 몇 년을 주구장창 종이에 그림만 그렸다. 오히려 한정적인 재료 안에서 창의성이 생겨난다고 느낀다. 아직은 집에 굴러다니는 재활용품으로도 충분하다.
아이와 함께 상자를 동그랗게 잘라 그림을 그리고 구멍을 뚫고 실을 넣어 스피너를 만들었다. 실을 잡고 동그란 판을 돌리며 시범을 보이니 배시시 웃으며 자기도 해보겠다고 나서는 모습이 귀여웠다. 재미있었는지 몇 번이나 또 만들자고 해서 스피너를 세 개나 만들었다. 누군가가 보기엔 엉성해 보일지 모르지만 반듯하게 갖춰진 준비 재료들보다 더 멋지게 느껴졌다.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뚝딱뚝딱 혼자서 무언가 만들더니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니 박물관에서 봤던 장면이란다. 선사유적 박물관에서 선조들이 물고기를 잡아 나무 막대에 꽂아 놓은 걸 기억하고 비슷하게 따라 했던 거다. 저 구멍을 어떻게 뚫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재미있게 만들고 몇 번 놀다 금세 사라질 놀잇감들을 이렇게 재활용 쓰레기로 만들면 마음이 너무 편하다. 추가 쓰레기를 생산하지 않았다는 만족감과 더불어 버릴 때 분리배출도 편하니까.
2022년도에 구매해서 여태 잘 쓰고 있는 미술 재료가 있다. 그건 바로 천연 색소 가루다. 빵이나 떡 등을 만들 때 소량 넣어 색깔을 내는 용도로 쓰이는 것인데 아이 세 살 때 구매해 다섯 살이 된 지금까지도 너무나 유용하게 잘 쓰고 있다. 처음엔 작은 플라스틱 통에 소량씩 여러 가지 색상이 들어있는 걸 구매했는데 아무래도 식용 색소다 보니 가격도 부담이 되고 너무 금방 쓰게 돼서 3가지 색상만 대용량으로 구매했다. 빨강, 노랑, 파랑이 있으면 초록과 주황, 보라도 만들 수 있으니 6가지 색이 있는 셈이다.
대부분의 물감은 화학 성분으로 되어 있다. 피부가 예민한 아기를 위해 구매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용 후 버려질 때 하수구로 흘러들어갈 물감들이 조금이나마 지구에 덜 해가 되는 것들이길 바랐다. 언제까지 이렇게만 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괜찮았다.
천연 색소의 용도는 아주 다양하다. 여태껏 가장 많이 활용한 건 물감 놀이다. 놀이 후 정리와 청소가 힘들어 목욕시간을 주로 활용했다. 작은 플라스틱 통 안에 빨강, 노랑, 파랑 물감을 만들어주면 혼자 들어가 한참 동안 그림을 그리고 놀았다. 천연 색소는 조금만 넣어도 색이 진하게 나와 좋았는데 조금 더 물감 같은 끈적한 질감을 만들어주기 위해 밀가루를 조금 섞기도 했다. 유기농 국내산 밀가루를 차마 놀이에 쓸 수는 없었고 날짜가 지난 부침 가루 같은 것들을 이용했다. 붓이 없을 땐 다 쓴 칫솔이 훌륭한 붓이 되어주었다. 이 놀이는 두 살 때부터 다섯 살이 된 지금까지 꾸준히 좋아하고 있다.
두 세살땐 다 쓴 시약병에 물감을 담아 스케치북에 흩뿌리며 놀기도 했다. 붓으로 그리는 그림과는 또 다른 느낌이라 아이가 즐거워했다. 어린아이에겐 시약병에서 물감이 나오는 그 자체도 신기한 경험이 되었다.
아이와 병원 진료후 약을 타러 약국에 갈 때 마다 일회용 시약병을 많이 받게 된다. 먹일 때 쓰라고 시약병을 몇 개씩 추가로 주는게 일반적인데 매번 거절하고 집에 있는 실리콘 다회용 시약병을 쓴다. 그렇더라도 약을 담아주는 시약병 한 두개는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냥 버리기 아까워 씻어서 보관해두었더니 미술 용품으로 요긴하게 쓸 일이 많았다.
베이킹 소다와 천연 색소를 섞은 용기에 스포이드로 식초를 떨어트려 보글보글 거품을 만드는 미술놀이도 아이가 어릴때 정말 좋아했던 놀이다. 물감 담는 용기 역시 거창한 걸 따로 살 필요가 없다. 요거트 먹었던 용기를 잘 모으면 딱 적당한 크기의 물감통이 된다.
집에 있는 것들로 활용하는 게 일상이 되다 보니 아이도 재활용품을 활용해 만드는 걸 좋아한다. 정답이 정해진 놀이도구는 별로 없다. 아이는 스스로 쓸모를 정하고 자기만의 세상을 펼쳐낸다.
다섯 살이 된 아이와 새롭게 할만한 미술놀이가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휴지심이 생각났다. 휴지심을 가위로 자르고 펼쳤더니 멋진 미술 도구가 되었다. 붓 대신 물감을 묻혀 도장처럼 찍었다. 마치 꽃 같았다. 파란 꽃, 노란 꽃, 빨간 꽃.
상자에도 찍어보고 싶다고 하고 색깔을 섞어보고 싶다고도 해서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었다. 멋진 작품은 필요하지 않다. 다섯 살 수준에 맞지 않는 완성도 높은 결과물은 선호하지 않는다. 아이가 해보고 싶은 실험을 다 해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종이에 툭툭 찍은 물감이 꽃 같지 않냐며 크레용으로 줄기를 그려주었더니 아이는 초록색 크레용을 골라 풀밭을 그렸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둘만의 작품이 완성되었다. 난 이런 게 왜 이렇게 소중할까.
그림을 그린 종이는 스케치북이 아닌 달력이었다. 남는 달력 한 장을 찢어 사용했다. 우리 집은 달력을 걸지 않지만 부모님댁에 가면 늘 커다란 달력이 벽에 걸려있다. 아이랑 그림 그리기에 여유로운 사이즈라 연말에 다 쓴 달력이나 남는 달력이 있으면 늘 챙겨가지고 온다.
우리의 미술 놀이엔 정답이 없다. 쓸모도 정해져있지 않다. 스스로 놀이 도구를 만들고 어떻게 해야 놀이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한다. 거창한 고민은 없다. 집 안을 청소하다 '어 이거 괜찮겠는데?'라는 생각이 들면 아이에게 '이걸로 뭘 만들 수 있을까?'라고 묻기도 한다.
아이는 늘 나보다 아이디어가 많고 창의적이다. 진정한 창의성은 결과가 정해진 놀이보다 약간의 결핍과 생각할 수 있는 빈틈으로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게 아이가 살아갈 환경에 조금 덜 유해할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