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되었다.
12월은 언제나 준비되지 않았을 때 훅 다가와 한 해가 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또 이렇게 올해가 갔구나. 특히나 올해는 더 빨리 지나간 것 같다. 아이 키우며 사업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은 균형이었다. 아이는 한참 손이 많이 가는 나이라 이것저것 해줘야 할 것들이 많고 제로웨이스트샵 운영은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아 늘 정신이 없었다. 매장 운영, 스마트 스토어 운영, sns 채널 관리, 플리마켓 참여, 업사이클링 제품 제작에 이어 올해는 자격증을 따고 강의까지 입문했다.
첫 강의를 끝내고 난 소감은 아무래도 난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는 점이다.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어야 그것에서 가치와 의미, 보람을 느낀다는 것. 그리고 그동안 해왔던 일들의 노하우가 업을 전환했다고 해서 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친환경적인 것들로 치환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에 어떤 맥락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된 건 매주 새로운 주제를 준비해 팟캐스트 방송을 녹음했던 경험이 팔 할이다. 책을 읽고 미술관에 가고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보며 알게 되었던 많은 것들이 문화를 이해하고 콘텐츠로 재생산하게 만드는 소스가 되었다. 기후위기와 친환경 문화에 대한 나만의 관점이 생긴 것도 환경과 관련된 다양한 콘텐츠를 접하며 경험과 지식을 쌓았기 때문이다.
결국 휘발되는 건 없구나. 당장의 성과로 눈에 보이지 않아 초조했던 시간들도 있었지만 그것들을 한꺼번에 쏟아내고 나니 인풋의 소중함과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앞으로 한참은 더 공부해야 한다. 공부가 하고 싶다. 의무감으로 하는 공부가 아니라 더 많은 세계를 만나기 위해 떠나는 즐거운 공부.
오랫동안 기다리던 제안을 받았다. 내가 그 제안을 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촘촘히 쌓았나 돌이켜보았다. 왜 나에겐 빠른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까 초조했던 시간들이 생각났다. 그땐 몰랐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 정도는 필요했다 싶을 정도의 시간이다. 무언가 수면 위로 올라오려면 치열하게 밀도를 높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세상이 모두 쉽게 결과를 얻는 것처럼 보여 자꾸만 나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하더라도 꾸준히 앉아 기다림과 내공을 다져야만 한다.
중요한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든다. 땅을 고르는 시간이 끝나간다. 이제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지을 차례다. 오래도록 고른 땅에 빈약한 기둥을 세운다면 이보다 허무할 수 없을 거다. 역시나 내 방식대로 촘촘히 쌓아 올리는 수밖에. 누군가 나를 앞서가더라도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길을 가는 수밖에.
12월은 인풋의 달로 삼기로 했다.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도 있는 법. 열심히 달리며 쏟아낸 11개월 대신 마지막 한 달은 읽고 쓰고 보며 가득 채우고 싶다. 그래야 또 나눌 수 있을 테고 내가 내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을 테니. 더 다채롭게 퍼뜨릴 수 있을 테니.
주말에 온 가족이 동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린다. 도서관은 절로 책을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힘이 있다. 주로 아이를 위해 어린이 도서관에 가지만 나를 위한 책도 열심히 빌려 가열하게 읽어볼 생각이다.
모든 것이 인풋일 나이. 아이는 정말 도서관을 잘 즐긴다. 남편은 아이의 인풋에 진심이다. 요즘 한참 좋아하는 티니핑 동화책은 인기가 많아 예약을 해야만 빌릴 수 있는데 남편은 열심히 도서관 앱을 들락날락하며 매번 예약에 성공한다. 티니핑 책을 손에 넣는 날은 어떤 성취감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아이보다 더 좋아하는 모습이 왜 이렇게 웃긴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동네 카페에서 읽으며 따뜻한 오트라떼 한 잔을 마시는 일이다. 주로 평일 휴무날의 루틴인데 귀하고 귀한 혼자만의 시간이라는 점도 좋고 오트라떼를 마실 수 있다는 것도 좋고 여유롭게 책을 읽는다는 것도, 창밖에 버스와 사람들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좋다. 소름 끼치게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라는 것도 은근히 맘에 드는 점이다.
넷플릭스 다큐를 하나 보기 시작했다. 쇼핑의 음모에 관한 것인데 아주 흥미롭다. 어쩌면 사람들에게 빙하가 녹아내리는 장면보다 이 사회가 잘못 흘러가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게 더 설득력 있을지도 모르겠다.
패션 트렌드 분석하는 회사에 일하던 시절에 라이프스타일 팀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소비자 조사를 할 때 사회학 책과 다큐에서 많은 인사이트를 얻곤 했다. 환경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환경 파괴의 원인이 현대 사회의 많은 이해관계와 시스템, 사람들의 심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보니 사회학적 맥락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매우 중요하다.
당분간 다큐멘터리와 영화도 하나씩 도장 깨기 해야겠다.
12월은 그렇게 조용하게 치열하게 달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