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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양 May 15. 2020

레베카(Rebecca,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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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알프레드 히치콕의 첫 할리우드 입성작이다. 아마 영화를 즐겨 보지 않는 이라도 '히치콕'의 명성만큼은 귀에 익을 것이다.  특히 <사이코>의 명장면은 수도 없이 매체에서 재생산되어서, 이제 사람들은 해당 장면의 영화사적 의미를 모르면서도 짐짓 고개를 끄덕이며, "히치콕, 대단한 감독이지." 정도의 감상을 내뱉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히치콕에 대한 이러한 인정이 히치콕의 영화를 찾아보는 열정으로까지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워낙 볼 것이 천지인 현대사회 아니던가. 고전영화는 일부러 검색하지 않는 한 오색찬란한 요즘 영화에 묻히고 만다. 그건 비교적 고전영화에 대한 애정이 있는 필자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지금껏 히치콕의 작품은 수업때문에 3편 가량 본 것이 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런치 작가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찾아본 작품이 <레베카>라는 것은 영화를 "쫌 안다"는 사람으로서 브런치에 소개되고 싶다는 내 안의 작은 열망을 반영한 것이다.



<레베카>에는 레베카가 없다


<레베카>에 대한 나의 기억은 어언 10년 전, 뮤지컬 덕후로서 활약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학로에 거주하며 찔끔찔끔 연극이나 뮤지컬을 관람하던 나는 전설적인 작품 <빌리 엘리어트>(정작 이 작품은 역삼에 위치한 LG 아트센터에서 공연했다)를 만난다. <빌리 엘리어트>로 LG 아트센터의 문턱이 닳도록 회전문-뮤지컬 팬들이 같은 작품을 반복해서 보는 일을 일컫는 말-을 돌며 뮤지컬의 진정한 재미를 알게 된 후로 4~5년 간은 통장에 입금되는 거의 대부분의 돈을 티켓값으로 소비했다. 2013년 한국에 초연을 올린 뮤지컬 <레베카>도 그래서 "알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레베카>를 보러 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오래된 기억 구석을 더듬는 이유는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느꼈던 당혹감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당시 <엘리자벳>이라는 뮤지컬로 뮤지컬 배우로서 확실한 입지를 다진 옥주현이 <레베카>에 출연한다는 사실을 듣고 내가 처음 한 생각은 물론, "옥주현이 레베카구나"였다. <엘리자벳>에서는 옥주현이 엘리자벳이고, <아이다>에선 그녀가 아이다였으니까! 그런데 7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알았다. <레베카>에는 레베카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여주인공의 이름은 레베카가 아닙니다

영화가 진행되는 시점은 이미 레베카가 죽은 이후로, ‘나’는 고용주를 따라 간 휴양지의 호텔에서 레베카와 사별한 맥심을 만나 급속도로 사랑에 빠진다. 맥심과 바로 약혼을 하고는 맨덜리의 대저택에 갈 때까지만 해도 신데렐라는 행복했다. 그런데...



맨덜리에 드리운 레베카의 그림자


레베카가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제목이 <레베카>인 데에는 아주 합당한 이유가 있다. 레베카는 비록 화면에 모습을 비추지 않지만 영화의 초반부터 종반까지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한다. 레베카가 없는 모닝 룸에서도, 집에서 유일하게 바다가 보이는 레베카의 방에서도 레베카는 독기 어린 눈으로 '나'를 좇는다. 히치콕은 주인공인 ‘나’가 느끼는 이러한 실체 없는 공포를 관객들 또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도록 영화적 장치를 십분 활용한다. 특히 후반부에 맥심이 자신과 레베카의 이야기를 ‘나’에게 터놓을 때에는 화면의 빈 구석에서 관객들로 하여금 레베카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집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레베카의 이니셜 “R”도 그러한 장치 중 하나이다. 그러나 레베카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영화적 장치 중 내가 가장 흥미롭게 느낀 것은 바로 작위적인 그림자들이었다.

레베카의 존재감은 댄버스 부인으로부터 기인한다.

절대 자연스러운 조명에서 만들어질 수 없는 위와 같은 작위적 모양의 그림자는 감독의 의도를 다분히 담고 있다. 맨덜리에 레베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레베카의 그늘 안에 있는 댄버스 부인은 작품 내내 ‘나’와 관객을 압박하는 캐릭터로, 사실상 레베카의 존재감은 바로 이 댄버스 부인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레베카가 맥심과 결혼해 처음 맨덜리에 들어온 때부터 레베카와 함께 있던 하녀로, 레베카의 죽음 이후에도 맨덜리 저택이 여전히 레베카의 취향대로 돌아가게끔 집안을 관장한다. 그녀는 레베카와 다르게 사교계에 익숙하지 않은 ‘나’를 끊임없이 레베카와 비교하고, 맥심은 레베카를 잊지 못했음을 강조한다. 댄버스 부인이 맨덜리의 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나’는 결국 댄버스 부인의 말대로 휘둘리게 되고, 남편인 맥심 역시 댄버스 부인과 같이 자신을 레베카와 비교하고 자신에게 실망했을 것이라 단정한다.



‘나’를 잊어버리는 ‘나’


‘나’는 결국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를 걸치고, ‘레베카처럼’ 되려고 한다. 화려한 옷을 입고, 사교계에 능숙하고, 가장무도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맥심의 전부인, 레베카를 추구한다. 당연히 ‘나’에게 그런 옷은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변한 ‘나’를 보고 좋아하지 않는 맥심을 보고 “역시 나를 레베카와 비교하고 있구나.”라고 착각한다. 이미 댄버스 부인의 세뇌는 성공적으로 ‘나’의 머릿속에 들어앉아 ‘나’의 기준을 현재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인 레베카로 설정해버린 것이다. 이미 죽은 자에 대한 평가는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고 위로만 향한다. ‘나’는 절대로 레베카와 같이 ‘될 수 없다’.


많은 이들에게도 ‘나’와 같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유행을 좇아 쇼핑몰에서 어울리지도 않는 원피스를 주문하고서는 정작 원피스를 입은 날에는 그 옷에 어울리지 않는 나를 실감하면서 위축된 채 하루를 보냈던 기억. 30대인 필자도 여전히 쇼핑몰에서 모델이 입은 모습을 보고 혹해서 샀다가 실망하는 일이 가끔은 있지만, 20대 초중반보다야 실패 횟수는 훨씬 적다. <레베카>에서 ‘나’는 레베카와 맥심과는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기도 했지만, 레베카와 맥심보다 나이가 한참 어리기에 자신에 대한 확신 또한 부족하다. 게다가 성격까지 소심해서, ‘나’가 맥심에게 새로 산 드레스를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소위 말하는 공감성 수치가 극에 달해 필자의 얼굴까지 화끈거렸다. 이때 ‘나’를 연기하는 배우 조앤 폰테인의 연기가 일품인데, 이러한 그녀의 연기에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맥심을 연기한 배우 로런스 올리비에는 당시 연인이었던 비비안 리를 상대역으로 추천했으나, 비비안 리가 소심한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인인 조앤 폰테인이 캐스팅되자 이를 불만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조앤 폰테인을 현장에서 쌀살맞게 대했고(애꿎은 곳에 화를 푼 격이다), 결국 조앤 폰테인은 촬영 현장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후에 조앤 폰테인이 인터뷰에서 자신만 미국 사람이었고 현장의 대부분이 영국 사람이었기 때문에 현장에서 적응할 수 없었다고 언급한 것을 보아 따돌림은 분명히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이러한 이유로 당시 신인이었던 조앤 폰테인은 현장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이런 현장 분위기는 ‘나’가 맨덜리의 저택에서 위축된 모습과 겹쳐 캐릭터의 설득력을 높이는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조앤 폰테인이 실제로 현장의 따돌림에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그녀에게 레베카의 존재는 비비안 리로 구체화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상술한 비하인드와 <레베카>의 서사가 겹치는 것이 꽤 흥미로운 사실로 느껴진다.


또한 이러한 에피소드는 당시의 할리우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영화에서 자기 여자친구 안 써줬다고 상대 신인 여배우를 따돌리는 남배우에 대한 소문이 퍼진다면, 아마 그 남배우는 이후에 국가적 왕따의 대상이 될 것이다. 물론 여전히 지금도 영화판은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적어도 로런스 올리비에 같이 대놓고 쪼잔하게 굴진 못한다는 거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할리우드의 황금기에는 여성 감독이나 여성 제작자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던 시기로, 당연히 지금보다 영화판에서 여성의 입지가 더욱 좁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앤 폰테인은 신인 여배우다! 히치콕이 ‘나’의 소심한 모습을 끌어내기 위해 현장의 분위기를 그렇게 의도했다는 것을 과연 예술가로서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일화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여성 인권 유린의 일화로 봐야 할 것인가는 어려운 문제이다. 언제나 예술은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넘나드는 행위에 대한 훌륭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끝까지 극을 지배하는 R


이렇게 ‘나’(와 조앤 폰테인)는 점점 궁지에 몰리고, ‘나’의 시선을 따라가는 관객의 가슴에도 돌덩이 같은 부담감 비슷한 것이 얹어진다. 상황은 댄버스 부인과 레베카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가고 ‘나’가 맨덜리를 떠나는 것 말고는 어떠한 방식의 해피엔딩도 불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서스펜스 드라마가 그렇듯 이 영화에도 ‘반전’이 존재한다. 그것도 ‘거듭’ 존재한다. 옛날 스릴러 영화를 보면 그 당시에는 기발했지만 그 이후 반복적으로 클리셰로 기능하는 바람에 흔해져 버린 반전 요소들이 자주 보이는데, <레베카>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반전의 기발함 때문에 영화를 다 본 관객들은 [‘나’와 맥스가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의문보다는 [레베카는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을 더 크게 느끼게 된다. 끝까지 얼굴 한 번 나오지 않는 레베카는 그렇게 이 영화를 지배한다.




나가며


여러 이야깃거리를 남겨두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치콕의 카메라를 따라 이야기를 쫓아가는 것은 색다른 자극이었다.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걸맞게 인물의 옷차림부터 시작해서 웅장한 맨덜리 저택 곳곳에 배치된 소품들까지 조화롭지 않은 곳이 없다. 정말로 이렇게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장인의 정신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역시 고전영화가 좋은 이유는 등장인물들의 멋스러움 때문이다. 흐트러짐이 없는, 혹은 그 흐트러짐마저 아름다운 당시의 인물들을 보는 게 정말 좋다. 댄버스 부인의 극강의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늘 완벽한 머리 스타일을 고수하는 ‘나’를 보라. 인물들의 정갈한 패션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진심으로 사랑한다.



+)

벤 휘틀리 감독의 <레베카>가 마침 2020년 개봉을 한다. ‘나’는 <신데렐라>로 알려진 릴리 제임스, 댄버스 부인은 크리스틴 앤 스콧 토머스, 그리고 맥심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올리버였던 아미 해머가 분한다.


+)

참, 옥주현은 과연 뮤지컬 <레베카>에서 누구였는가 하면 바로 댄버스 부인이었다. 내가 어디 가서 아는 척한다고 “옥주현이 레베카 역을 맡았지, 아마?”와 같은 말을 지껄이지 않은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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