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식구근에게 따뜻한 가을이 미치는 영향
추식 구근은 전량 수입 해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적응성이 좋고, 또한 국내에 자생하는 야생종이 있는 수선화 조차도 판매용 구근은 외국에서 수입 해 온다.
이렇게 수입되는 구근은 대부분이 유럽 원산지이고, 유럽에서 우리나라로 오는 가장 저렴한 운송편은 지중해에서 홍해, 인도양을 거쳐 인천으로 들어오는 배편이기 때문에 우리는 구근을 10월 말이나 11월 이후에야 구입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검역법과 검역 절차등이 달라지고, 운송편도 다양해지면 구근 수입 시기도 앞당겨 지면서 구근의 이른 식재로 인한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 구근은 자연중에 자생하는 식물이니 이른 가을에 심었다고 별나게 문제 될 것은 없다.
정확히는 지금 나타나는 이른 식재의 문제는 지구의 문제라 볼 수 있다.
일반인들은 바쁜 일상을 사느라 날씨 변화에 조금 둔감하다. 조금 별난 날씨가 나타나야 기상청이 또 틀렸구나, 아니다 지구가 이상한가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날씨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 들인다.
꽃이 필 시기에 꽃이 피지 않고, 잎이 사그러질 시기에 잎이 사그라지지 않으면 그 원인은 반드시 날씨에 있다. 이런 데이터가 쌓이고 쌓여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나 식물을 키우는 가드너들은 지구 온난화가 빚어내는 변화를 남들보단 심각하게 체감하게 된다.
추식구근에도 지구 온난화는 영향을 미친다.
추식구근은 햇빛의 영향에선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중일(中日) 식물로 불리운다.
이런 중일식물들은 온도의 변화에 민감하기 때문에 만약 온도가 예측 불가한 영역대로 변화하면 정상적인 성장이 어려워진다.
재 작년 겨울은 유독 따뜻했다. 그래서 날씨가 추워져야 뿌리가 나는 추식구근들이 제대로 뿌리를 뻗지 못한 상태에서 높은 온도에 꽃을 피우려다 죽는 일이 많았다.
작년 같은 경우는 폭염이 쏟아져야 할 8월에 종일 비가 내리고, 그늘 지고, 날이 쌀쌀해졌다. 이로 인해 9월에 싹이 나는 무스카리가 8월 초에 싹을 이미 한 뼘 이상 뻗어버리기도 했다.
그래 놓고 정작 가을에는 지나치게 따뜻해서 일찍 심은 구근들을 물러 썩게 만들기도 했다.
올 봄엔 온도가 갑자기 올라 일주일 지속된 적이 있었다. 이때 피어난 튤립은 순식간에 만개 한 후 시들어 버렸다. 그래도 피고 나면 실내에서 적어도 2주 정도는 보는게 튤립이었지만, 2주도 채 보지 못한 튤립도 나타났다.
그래 놓고선 오히려 4월이 되어서는 추운 날씨가 지속되어 늦게 피는 튤립은 한 달 가까이 꽃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온도가 올라가겠거니 했지만, 4월부터 시작된 저온은 6월 초까지 이어져서, 실내는 물론 노지에 심은 추식구근들이 6월까지 푸른 잎을 지닌 경우가 허다했다.
모든 온대기후 식물들은 수만년을 기후에 적응해오며 각 시기별 필수과업을 나름 정해 놓았다.
우리는 달력이 있어 달력을 보고 시기별 해야 할 일을 하지만, 달력이 없이 오로지 날씨에 의존하여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는 식물은 온도의 교란이 일어나면 해야 할 시기에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만다.
올 가을은 작년 만큼 따뜻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올 가을 역시 유난히 따뜻하다 느껴지는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에 한국의 날씨는 지나치게 맑았고, 대신에 이웃 국가인 일본과 중국에선 전례없는 태풍이 광범위하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구근을 심은 사람들은 울상을 지었다.
구근을 심고 흙에 물을 흠뻑 주었는데, 따뜻한 온도 때문에 뿌리는 나지 않고, 풍분한 흙 속 유기질을 먹고 번식한 혐기성 미생물이 구근을 썩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창문이 열려 있어 신선한 바람이라도 계속 불었다면 화분의 흙이 빨리 마르고, 흙 속에 신선한 공기(산소)가 공급되며 구근이 썩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게 시기적절한 섬세한 케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섬세한 케어 속에서도 약한 애들은 쉬이 환경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너지는 법이다.
추식구근은 무조건 춥게 키워야 한다.
건강한 구근을 정확한 지식으로 훌륭한 환경에서 키우면 춥지 않은 환경에서도 예쁜 꽃을 피울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춥게라도 키워야 최대한 많은 구근을 최대한 많은 사람이 꽃 피울 수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튤립과 같은 추식구근을 키우길 바란다.
그것은 나 자신이 500원짜리 구근으로 큰 행복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튤립은 다른 비싼 관엽 식물과 달리 저렴하면서도 다이나믹 하고, 탄생과 성장에서 죽음과 재 탄생까지 보여준다.
튤립을 한 계절 키우다보면 나는 나의 삶도 이러하겠구나 덤덤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웃기는 얘기지만, 나는 전에는 여자는 무조건 젊은게 장땡이라는 아저씨들의 말에 반발심을 크게 가졌었다.
그런데 튤립을 키우면서 그 말에 공감하게 되었다.
젊은 것 자체가 이쁜 것이라는 어르신들의 말을 갓 피어난 튤립의 꽃 봉오리를 보며 순수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삶의 탄생과 성장, 절정, 쇠락,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마치 내 삶을 예행연습 하는 기분을 준다.
그리고 죽었지만 구근을 남겨 다시 다음생을 준비하는 튤립을 보고 있으면 내가 죽어 흙에 묻히더라도 그 양분으로 다른 생이 시작되겠구나 싶어 그 끝이 영영 끝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된다.
가끔씩 막연한 죽음의 공포가 다가올 때면 이런 생각이 꽤나 도움이 된다.
튤립을 키워보라 권하는 이유는 짧은 기간 내에 나의 모습을 투영해서 나의 삶을 제3자적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고, 이 과정에서 내가 튤립의 성장에 도움을 주고 보살핌을 제공하면서 내가 나를 보살피고 치유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치유보단 자기 비판과 자기 검열을 하며 살아오도록 강요 받은 세대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시간과 돈을 쓰는 경험은 무엇보다 필요하다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500원짜리 튤립을 키우는 일은 쉽고도 부담이 없으며 보상은 너무 아름답다.
이런 튤립을 더 많은 사람들이 키우게 하기 위해서라도 지구의 온도 변화가 안정되었으면 좋으련만, 지구의 온도 변화는 더욱 종잡을 수 없다.
그럼에도 더 많은 지식을 채워 이런 변화에도 대응하는 것이 가드너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기후 온난화로 인한 가을철 온도 상승을 염려하여 이런 경우 냉장 보관 등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판매처의 당부가 있었다. 냉장고에 후숙 과일등이 적게 보관 되어 있는 가정이라면 냉장고의 도움을 받는 것도 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냉장고의 온도를 미리 확인해야 한다.
우리집의 냉장고의 경우 냉장 보관 온도가 영상 1도 이다. 보통은 영상 2도에 맞춰져 있다고 알고 있다.
튤립, 수선화, 히아신스 같은 구근은 영상 2도에도 문제가 없지만, 라넌큘러스, 프리지아, 아네모네처럼 노지 월동이 안 되는 구근은 구근이 불어 있는 상태에서 장시간 있게 되면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니 냉장도의 온도를 5도 이상으로 조절하여 보관하다 심거나, 아니면 아예 심는 것을 유보하는 것을 추천한다.
일찍 사 놓고 늦게 심으면 손해보는 기분이 들 수도 있지만, 비싼 돈 주고 산 구근이 썩어버리는 것보단 그 편이 낫다. 그리고 뒤늦게 사려고 하면 아예 구입 자체를 못 하는게 이들 구근이다.
그러니 아직 심을까 말까 고민된다면 아예 식재 시기를 미뤄보고, 이미 심어버린 후라면 최대한 서늘한 반그늘에 두되, 신선한 공기가 유입 될 수 있게 환기에 유의해 보자.
이번주 부터는 밤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덕분에 한 쪽 코가 막혔지만, 그럼에도 이런 낮과 밤의 급격한 온도 변화가 무척이나 반갑다.
이번 주 후부터는 구근을 심으며 혹여 뿌리가 안 나고 썩을까봐 마음 고생하는 일은 없어지지 않을까 싶다.
부디, 늦가을까지 지구가 변덕 부리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