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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의 가드닝 Oct 15. 2021

내 구근만 뿌리가 안 났나요?

당연한 듯 당연하지 않은, 뿌리 내림의 미묘한 조건



구근을 흙에 심으면 뿌리가 나는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만 평에 가까운 밭에 수십만개의 마늘 구근을 심으면 구근이 썩지 않은 이상 뿌리가 났다. 다만 비가 오느냐 안 오느냐에 따라 뿌리가 나는 시기가 달라지곤 했다.


지속적인 경험은 마음 속에 진리처럼 느껴진다. 오랜 세월에 축적된 경험은 과학자의 논문보다 더 강한 믿음을 불러 일으키는 법이다.


내가 실내가드닝을 하면서 느낀 첫 당혹감은 이런 진리가 하나의 경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에 찾아 왔다.




애를 먹인 구근은 히아신스였다.

생장점에 뿌리가 금방이라도 나올 듯 울긋 불긋 솟고, 위로는 싹과 꽃대까지 쑤욱 올라왔으면서, 좀처럼 흙에 뿌리를 뻗지 않았다.


전년에 2월 초에 구입해서 심은 구근들이 모두 뿌리를 잘 내리고 예쁘게 꽃을 피웠던 터라, 같은 방식으로 다음해에 심은 히아신스에서 뿌리가 나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필이면 '시티 오브 할렘'이라는 품종에서 동일하게 벌어진 일이라, 이 일이 이 품종만의 개별적인 문제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 히아신스 발아의 수수께끼가 풀린 것은 다음해 가을이었다.



작년 초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가을이 유난히 더웠던지라, 상대적으로 초겨울의 날씨가 한파처럼 느껴졌다. 이 즈음 구근을 사서 심은 사람들 사이에서 '뿌리가 안 난다'는 문의가 많이 쏟아지게 되었다.

저온처리까지 하고, 생장점에 뿌리들이 부산행의 좀비처럼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부풀어 있는데 흙에 심어도 뿌리가 나지 않는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이것의 이유를 찾기 위해 나는 알고 있는 지식의 처음부터 다시 되짚어 보았다.


구근의 뿌리가 나는 발동 조건은 누가 뭐라 해도 '온도'였다.

중일식물인 구근은 온도에 의해 컨트롤 되는 로보트라 해도 무방해서, 정해진 온도에 도달하면 뿌리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여기에 변수가 있었다. 바로 저온처리라는 것이었다.


저온처리는 인위적으로 구근에게 일정기간의 추위를 겪게 하는 것이다. 온대기후 식물은 저온을 통해 겨울을 인식하고, 이 온도에 따라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따라서 가을이 되어야만 뿌리가 나는 추식구근에게 저온처리는 이제 휴면기에서 깨어나 뿌리를 내리고 성장을 시작하라는 출발신호와 같았다.


저온처리를 겪은 구근은 온도가 내려가지 않아도 뿌리를 내게 된다. 우리가 구입하는 구근의 대부분이 생장점의 뿌리가 부풀어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식물은 마냥 단순하진 않아서, 저온처리를 겪었다고 바로 뿌리를 무지막지하게 내리지 않는다. 여기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선 추가적 조건이 필요했다. 바로 물이었다.


뿌리가 안 난다고 하는 구독자들에게 구근을 대야에 담궈, 하룻밤만 둬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모든 구독자들이 튤립 구근에서 뿌리가 돋았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수선화와 히아신스는 그렇게 해도 뿌리가 나지 않았다. 


그러면 뭐가 또 문제일까, 생각을 거듭하다 문득 그 전년의 히아신스 구근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때 그 히아신스에게 뿌리가 나지 않은 것이 그 구근의 문제만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 끝에 2월 말의 히아신스와 11월의 수선화와 히아신스의 공통점을 찾아보았다. 그 결과 너무 낮은 실내 온도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추식 구근은 온도만 낮으면 무조건 좋다는 명제가 흔들린 순간이다.


그럼 왜 히아신스와 수선화는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일단 히아신스와 수선화의 경우엔 뿌리 구조가 튤립과 다른 점이 한 몫을 했다.


추식구근인 프리지아, 아네모네, 라넌큘러스, 무스카리, 알리움, 튤립, 히아신스, 수선화, 크로커스 중에서 히아신스와 수선화, 알리움과 무스카리는 뿌리가 나는 바닥면이 반듯한 원형이다. 이 고른 바닥면에서 전부 뿌리가 나기 때문에 나중에 구근이 휴면기에 들어가면 이 부분이 전부 죽은 세포가 되어 구근에 두껍게 붙어 있게 된다.


자연상태에서는 흙에 심어진 동안 고온 다습한 여름을 만나며 그 시기에 미생물들의 왕성한 활동으로 죽은 세포들이 분해되어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판매용 구근들은 봄이 끝나는 시기에 땅에서 캐어져 죽은 세포가 붙어 있는채로 말려지게 되기 때문에 세포들은 더욱 단단하게 새 생장점 아래에 붙어 있게 된다.


이런 죽은 세포가 탈락이 되어야 새 뿌리가 자유롭게 뻗어나오게 되는데, 우리가 심었던 구근들은 너무 추운 시기에 심은 나머지, 흙에 미생물들이 활동을 잘 하지 못했다. 미생물들은 크기가 작은 벌레, 곰팡이, 균류이다. 이런 미생물은 온도가 높아야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추울 땐 거의 활동하지 못한다.


결국 추운 온도에 식재가 되며 미생물들이 충분히 활동하지 못했고, 죽은 세포를 제거하지 못한 상태에서 봄을 맞이하면서 '개화 온도'에 도달한 히아신스가 뿌리도 내지 않은 채로 잎과 꽃을 피워 올리게 된 것이다.


수선화와 히아신스의 뿌리는 좀 더 높은 온도에서 흙 내 미생물들이 충분한 활동을 하게 하면 언젠가 뿌리가 나게 된다. 이 시간을 충분히 줄 수 있으면 주되, 만약 마음이 불안하다면 칼로 죽은 세포를 잘라내고 심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바로 뿌리가 나더라는 구독자들의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튤립이나 프리지아, 샤프란 같이 생장점 부분에 죽은 세포가 붙어 있지 않는 구조의 구근들은 온도와 물이라는 조건만 맞으면 바로 뿌리가 난다. 다만 여기에도 작은 차이는 있다.


모든 식물들은 조생종과 만생종이 있다. 우리가 흔하게 먹는 벼 조차도 빨리 익는 벼는 '올벼', 늦가을에 익는 벼는 '만벼'라고 한다. 같은 쌀을 만드는 벼인데도 이렇게 시기가 다른 것은 벼라는 같은 식물 안에서도 품종마다 생존전략을 다르게 하기 때문이다. 


추식구근도 마찬가지다.

다양각색의 품종만큼이나 뿌리가 나고 꽃이 피는 시기가 다 다르다. 흔히 조생종은 보다 높은 온도에 뿌리가나고, 보다 낮은 온도에서 꽃을 피운다. 그래서 초가을에 뿌리를 내리고 초봄에 꽃을 피운다.

만생종은 반대다. 늦가을에 뿌리를 내리고 늦 여름에 꽃을 피운다.


이런 차이 때문에 품종간에 성장속도의 차이가 나타난다. 이러한 점을 모르고 추식구근을 심으면 남들은 뿌리가 났다는데 나는 왜 안 나나, 당황하게 된다.

현재는 10월 초반, 실내가드닝의 경우 흙의 온도가 밤에 영상 15도 까지도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조생종 튤립의 경우엔 뿌리를 내리지만, 더 낮은 온도에서 뿌리를 내리는 만생종은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실내 가드닝 환경의 특수성과, 구근 수입 유통시기의 특수성, 구근 자체의 품종간의 차이로 인해 뿌리가 나는 시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자세히 알고 보면 납득이 되는데 이를 모르고 키우다보면 남들과 다른 우리 구근의 성장속도에 애가 타들어 갈수도 있다.


추식구근들의 정확한 발아 온도, 개화 온도를 정리하여 그 정보를 제공한다면 우리들의 맘고생이 없어지겠지만, 튤립 구근을 판매하는 네델란드에서는 튤립의 많은 정보를 사람들과 나눌 생각이 없다. 하다못해 매해 꽃을 피우는 품종과 퇴화 되는 품종의 정보 조차도 비공식적으로 소수의 거래처에게만 알려주고 있는 현실이다.


이렇게 식물 품종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 없이, 우리는 그저 매 해 돈을 써가며 직접 정보를 얻을 수밖에 없다.

시행착오도 동시에 하면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지 않을까. 더 많은 사람들이 추식구근을 심기 바라는 마음에는 그런 소망도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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